누군가는 미래를 위해 시간을 계획한다. 나는 시간을 버티기 위해 일을 저지른다. 시간은 내가 모르는 분야이고 미래는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그렁그렁 거리는 세상을 향한 신음소리,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이들의 망상, 심연을 파고드는 불면에는 약이 없다. 불구덩이에서 잠시라도 살아남으려면 온몸에 물을 흠뻑 적신 후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불현듯 상가를 계약했다.
애초에 계획에도 없던 사건이었기에 미래를 그릴 수도 그릴 필요도 없다. 계획은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이고 나는 뜻밖의 운명을 기다린다. 뉴욕으로 떠날 때도 부동산에 들어갈 때도 계획은 나를 따르지 않았다. 누군가 마치 그렇게 하라고 귀에 대고 속삭이기라도 하듯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화실을 하려고 하는데요. 넓고 싼 곳 있나요?”
“한번 알아봐 드릴게요”
내 의사와는 상관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뉴욕에 다녀온 지 삼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실이라니. 내가? 왜? 무슨 화실을 한단 말인가. 시차 때문에 아직 잠이 덜 깼나 싶기도 했지만 정신을 차린 건 계약을 하고 난 후였다. 핸드폰 약정과 전셋집 외에는 계약을 해본일이 없다. 심신 미약에 의한 계약이라고 하면 이걸 번복할 수 있을까.
계약을 마치고선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건물주의 말에 당연히 그럴 거라고 자신 있게 받아쳤다. 그러는 동안 내 안에서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제 뭘 하면 되지, 어이없게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사업을 하면 잘할 거라는 막연한 환상과 기대로 가득 찼던 나에 대한 기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대학에서 실내건축을 복수 전공했다는 것, 건축사무소에서 6개월 남짓 알바를 하면서 옷가게와 빵집을 시공할 때 옆에 있었고 장난 삼아 가구를 디자인하고 만들어봤다는 것들 따위의 경험은 더 이상 나에게 자신감을 주지 않았다. 이건 가상공간에서 하는 테트리스 게임이 아니다. 나는 가상과 현실사이에서 어지럼증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