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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에서는, 단 한 번도 안된다

내가 잊지 못하는 기억

by 내가 지은 세상

작년 이맘때쯤, 휴직을 하고 한참 육아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이가 두 돌이 지나면서 떼쓰고 짜증 내는 강도가 점점 세지고 있었다. 여러 요구사항을 두서없이 막 얘기하고 바로 들어주지 않으면 짜증을 냈다. 나는 몸이 하나이다 보니 순차적으로 요구사항을 해결하는 건데, 아이는 아직 어려 그걸 모르다 보니 왜 자신이 말한걸 안 들어주냐고 짜증 내는 식이었다. 나도 어떤 날은 최대한 받아줬다가도 몸과 정신이 힘든 날은 같이 짜증을 내기도 했는데, 어느 날은 - 완전히 폭발을 해버렸다.


집에서 종종 아이와 함께 직접 반죽을 만들고 쿠키를 구워 먹고는 했는데, 그날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파란 쿠키 반죽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단호박 가루나 시금치 가루로 색을 내주곤 했는데, 왜 파란색은 없냐면서 파란 반죽을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썼다. 자연 재료에 파란색을 낼 수 있는 재료는 없어서, 겨우 달래고 설명을 해주고 다른 색을 내기로 했다. 얼른 아침 먹이고 어린이집 갈 준비를 해야 했지만 빠르게 해 보기로 하고 쿠키 만들 준비를 했다. 오븐은 미리 예열시키고 볼에 유기농 밀가루를 붓고 올리브유와 알룰로스를 넣어 반죽을 만들었다. 쿠키 틀을 꺼내어 아이가 쿠키 모양내는 걸 도와주고, 만든 것을 오븐에 넣었다. 쿠키를 만들면서 이번에는 파스타가 먹고 싶다고 해서 파스타 면을 삶았다. 면을 삶으면서 재료와 소스를 볶는 와중에 또 복숭아를 달라고 했다. 냉장고에서 복숭아를 꺼내 씻고 자르고 있었는데, 작게 자르기 전 큼직하게 잘라내는 과정에서 아이가 갑자기 "이거 커!!!" 하고 소리를 지르며 짜증을 냈다.


바쁜 아침에 끝없이 이어지는 요구사항을 빠르게 해결해 주려 애쓰고 있었는데 아이가 짜증을 내자, 여기서 나도 참지 못하고 "아니 지금 자르고 있잖아!" 하면서 같이 소리를 질러버렸다. 내 반응에 아이가 울면서 더 짜증을 내자, 나도 "니가 아침부터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면서 짜증 냈잖아! 그렇게 하면 돼 안돼! 돼 안돼!!!" 하고 정신줄을 놓고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이가 바닥에 드러누워 완전히 발작을 하듯이 울고 불고 구르고 난리를 치며 나를 때리는데, 이때 이성이 되돌아오며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열 살 무렵 아빠가 평생에 딱 한번 엄마를 때린 적이 있다. 나는 내방 침대에서 자고 있었고 엄마가 내방 바닥에 이불을 펴고 어린 동생을 재우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동생이 한참을 안 자고 계속 울어댔나 보다. 동생 울음소리와 함께 방이 소란스러워 잠결에 깨보니, 아빠가 "빨리 애 재우라니까 왜 안 재워!"라고 소리를 지르며 엄마를 때리고 있었다. 나는 잠이 싹 달아났지만 너무 무서워 이불을 덮은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불 밑에 누워서 눈만 내밀고 덜덜 떨면서 엄마 아빠 그리고 우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아빠는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 벌떡 일어나 "아빠 그만해, 그만하라고!"라고 소리를 지르며 엉엉 울었다.

내 목소리에 아빠는 흠칫 놀라 행동을 멈추고 이내 거실로 나가셨다. 방 불이 꺼져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엄마 얼굴에 멍이 든 것 같았다. 아빠는 거실에서 연거푸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술을 마시다 밖으로 나가 한참 바람을 쐬고 돌아오셨다. 그리고는 내 방으로 들어와 누워있던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아빠가 진짜 진짜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하고 사과를 하고 나가셨다. 하지만 나는 그날 이렇게 생각했다.


죽을 때까지 아빠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나는 그날 이후 아빠에게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단단히 닫힌 내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열리지 않았고, 갖가지 심리상담에서 내 인생 주요 사건으로 수없이 오르내렸다. 그날의 일을 받아들이고 아빠를 용서해보려 했으나 항상 실패했다.

정말 수많은 세월이 지나 어느덧 내가 그때의 아빠 나이에 가까워진 지금에서야 그래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하고 희미해지는 기억과 함께 겨우겨우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다 불현듯 어릴 적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 하루의 상처가 희미해지는데 25년이 걸렸다. 아이에게 단 한 번의 충격적인 기억도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몸소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한참을 사과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이 진정이 되겠니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계속 얘기했다. 과거의 아빠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후에 엄마가 오셨다. 엄마는 두 돌에 이 정도 자기표현은 아주 정상이고 당연한 거라고 했다. 말 잘 듣는 조용한 아이가 제일 위험하다고 하는데, 난 아이가 하나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자기표현이 당연한 거고 지나친 건지 판단이 잘 안 된다. 나에겐 아이가 너무 신경질적이게 느껴지고 그거에 내가 또 욱하고 내 반응에 아이가 더 자극이 되는 것 같았다. 앞으로는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이에게 절대 감정적으로 화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잊지 말자. 육아에서는 '단 한 번'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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