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로 와, 서서히 당당하게
“진로 교사가 되었으니까, 여유 있는 거 아니었어?
오십이 넘었는데 아직도 일에 시달리니?
이건 노동착취야. 요즘 사람들은 딱 월급만큼만 일한다는데…
뭘 또 강의를 들어요? 이제는 선생님이 강의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진로 교사가 된 뒤, 매일이 설레었습니다.
머릿속에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피어올랐습니다.
남편, 친구, 딸아이, 동료 교사의 이런 물음에 저는 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거 하나라도 더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서요.”
아마도 저는 50년간의 경험 보따리를 하나하나 꺼내 나누고 싶어 이 길을 택했나 봅니다.
그 안에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사랑이 있었고, 그 중심엔 늘 책이 있었습니다.
시와 글, 그리고 어머니—그것이 제 인생의 축이었습니다.
모죽을 아시나요?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죽은 심어진 뒤 5년 동안은 죽순이 땅 위로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오랜 기다림 끝에 한 번 자라기 시작한 모죽은 하루에 80센티미터, 순식간에 30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아마도 충분히 뿌리를 내리고 영양분을 모으느라 5년 동안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나 봅니다.
항상 저를 걱정하시는 어머니께서 말씀하십니다.
“칠십 이후에는 아주 좋대. 정말 좋대...”
칠십 이후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씀 속에서 제 삶을 봅니다.
아직도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느라 아프고 흔들릴 때가 많지만,
언젠가 단단하게 솟아오를 날을 믿습니다.
한석봉 같았던 아버지, 시를 즐겨 쓰는 오빠, 한때 일본인과 펜팔을 했던 언니,
김수영의 '폭포'를 낭송해 주시던 국어 선생님, 윤동주를 닮았던 수학 선생님을 만난 10대의 경험이
제가 시를 좋아하게 된 불씨였다고 생각합니다.
20대는 텅 빈 시간 같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간도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30대, 엄마가 되었을 때 육아의 힘듦을 견디기 위해 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도서관에서 만난 책과 작가 강연에 대한 소감을 적어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힘든 육아 경험이
10대 만들어두었던 불씨를
조금씩 타오르게 한 바람이 되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역 도서관은 제 삶의 중요한 배경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임용고시 준비 시절, 육아 시절
그곳에서 저는 ‘그림책과 함께하는 독서치료’를 만났고,
‘꿈 너머 꿈’을 이야기해 주신 고도원 작가님을 비롯해 다양한 작가를 만났습니다.
그 만남들이 저를 위로했고, 생각을 글로 쓰는 힘을 주었습니다.
글쓰기는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희망을 불러오는 일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제가 갖고 있는 불씨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그것들이 지금 조금씩 번지고 있어 어느 순간 모죽처럼 자랄 것 같습니다.
40대,
독서치료는 시 치료 공부로 이어졌고 시가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하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3 담임 경험은 자기소개서 쓰기, 면접 지도 등의 입시지도로 이어졌고
그 경험은 사람에 대한 이해가 인터뷰를 통해 깊어진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인문사회 부장을 할 때는 ‘인문학 서당’을 만들었습니다.
인문학으로 서서히 당당하게 되자는 취지였는데 참여한 학생들도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었지만
무엇보다 제가 서서히 당당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년을 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읽은 책과 만난 작가님들,
그 과정에서 만난 홍세화 선생님의 이야기는 지금도 가슴 깊이 남아있습니다.
서당에서 삼 형제에게 장래희망을 묻자,
첫째는 정승, 둘째는 장군, 그러나 막내는 ‘개똥 세 개’를 갖고 싶다고 합니다.
글 읽기 싫은데 정승이 되려는 큰 형, 겁이 많은데 장군이 되려는 둘째 형,
그리고 그런 대답을 만족스럽게 듣는 서당 선생님—
각각에게 개똥 하나씩 주고 싶어서입니다.
홍세화 선생님의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막내라면 그 말을 서당 선생님에게 할 수 있겠느냐.
못 한다면 마지막 개똥은 네가 먹어야 한다.”
홍세화 선생님은 살아오며 그 마지막 개똥을 조금이라도 덜 먹기 위해 힘썼다고 합니다.
저는 가끔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용기를 내어 말해야 할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렇듯 책과 작가와의 만남은 저에게 아름다운 용기를 주었고
더 나아가 또 다른 도전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었는데 이것이 곧 자아효능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차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시동을 거는 힘이지요.
저는 자아효능감을 늦게 발견했는데요
이것이 좋은 책과 작가 강연을 우리 학생들에게 만나게 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40대 끝자락에서 제가 갖고 있는 불씨들을 열거해 보았습니다.
인문학 서당 기획, 시 쓰기, 학생들과 함께한 자기소개서와 면접 지도, 생활기록부…
이것들을 똘똘 뭉쳐보니 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었고 저는 그 과정에서
50대, 진로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문학 서당을 이어 ‘나로와 서당’을 만들었습니다.
‘나의 길로 와 서서히 당당하게’ 이것이 제가 진로 교사가 된 이유이고
우리 아이들과 함께 걸어가고 싶은 길입니다.
20대의 빈 시간도 결국은 제 불씨를 지켜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 저는 아름다운 사랑을 알았으니까요.
당신에게는 지금 어떤 불씨가 있나요?
2025. 08.09. 오후 6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