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무덥던 여름이 저만치에서 작별의 손을 흔들고 있다. 숨어 있던 가을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주위를 살피는 듯하다. 늘 그렇듯 일 년의 시간은 다사다난했지만, 내게는 그 어느 해보다 특별한 의미로 기억될 한 해였다. 적어도 글을 쓰는 일에 있어서는.
봄꽃들이 앞다투어 피던 4월의 어느 날, 무거운 물건을 들다가 삐끗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통증이 깊어져 결국 입원을 했고, 척추 골절 진단을 받았다. 창밖은 활기차고 눈부셨지만 나의 일상은 갑자기 정지 상태가 되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지내며 나는 오랜만에 많은 생각을 했다.
병원에 입원하면서 잃은 것도 많았지만, 내겐 더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글쓰기에 눈을 뜬 것이다. 그동안 외면하고 살았던 글이 다시 마음을 두드렸고, 나는 펜을 잡았다. 퇴원 후 두 달 동안 두문불출하며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육아 경험을 묶어 전자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연히 브런치를 알게 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작가라는 이름은 낯설었지만, 내 마음을 끄집어내어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자마자 미야 작가님이 브런치북으로 엮어보라는 말과 함께 응원과 격려가 담긴 댓글이 이어졌고, 그 글은 내 마음에 불을 지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글쓰기는 활활 타올랐고, 나는 글신 들린 여자처럼 글에 매료되었다.
글을 올리면 여러 작가님들의 따뜻한 댓글이 달렸고, 그 소통은 새로운 글을 쓰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문득, 대단한 작가님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내가 과연 꾸준히 잘할 수 있을까, 주저앉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럼에도 글벗들의 격려와 나눔이 내게는 든든한 지지대가 되었고, 다시 용기를 내어 한 줄, 또 한 줄 쓰게 하는 힘이 되었다.
브런치북 <마녀의 밀실>을 연재하던 무렵, <미야의 글빵연구소> 강의가 올라왔다. 오프라인 수업은 아니었지만 그 어떤 유료 강의보다 알차고 열정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글쓰기의 구조 세우기, 상징 활용법, 글맥 잇기, 퇴고의 기술까지 총 17강은 글을 쓰는 작가님들에게 가뭄에 단비 같은 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서로 윤문을 하고, 합평을 할 때는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듯 치밀하고 정성스러웠다. 덕분에 우리는 서로의 글을 다듬어 주며, 더 빛나는 문장을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작가님들의 글쓰기의 자양분이 되었던 글빵연구소가 이제 졸업이라는 이름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문득 오래전 초등학교 졸업식이 떠오른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정들었던 친구들과의 이별이 너무 아쉽고 슬펐다. 후배의 송사와 졸업생의 답사에 모두가 눈물을 흘리던 그날, 나는 목 놓아 울었다. 짝사랑했던 남자친구와의 헤어짐이 더욱 가슴을 저며왔기 때문이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여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문득 혼자 흥얼거리다 보니, 이번 글빵연구소 졸업과 겹쳐진다. 다만 이번 졸업은 슬픈 이별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어쩌면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만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세계관을 세우는 일이라고 했다.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 발효되고, 흐름을 가지며 비로소 나만의 우주가 생긴다고 한다. 나는 멈추지 않고 쓰고 싶다.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열정이 아니라 오래도록 은은하게 타오르는 불꽃으로 내 안에 머무르게 하고 싶다.
얼마 전 브런치 작가님들의 작은 모임이 있었다. 온라인으로 다 전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직접 만나 회포를 풀기도 하고, 합평을 하면서 소중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얼굴을 맞대고 웃음을 나눈 시간은, 댓글로만 알던 글벗들을 더 소중한 마음의 벗으로 만들어 준 시간이었다.
졸업작품을 준비하며 글벗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불러본다.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서로 다른 글향기가 나는 것 같다. 글길이 외로울 때면 글벗들이 공감으로 내 등을 토닥여 줄 것이다.
미야 작가님의 수고와 열정이 아니었다면, 글을 세공하는 기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그 조용한 힘이 앞으로의 길을 밝히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