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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월급은 어디로 갔을까

퇴직 후에도 퇴근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

by 머니데일리

매일 퇴근길, 그는 집이 아닌 회사를 생각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중견기업의 전무.
그는 늘 회사에서 가장 늦게 나가는 임원이었다.


회의실 불이 꺼지지 않으면, 퇴근이 허락되지 않는 듯했다.
성실했고, 책임감 있었으며, 누구보다 회사를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받는 만큼 준비되었을까?

이제 퇴직을 한 그.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없다.


달력은 여전히 바쁘지만, 그 어디에도 그의 이름은 없다.
그래도 괜찮다고,
자신은 아직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명함을 반납하는 순간, 세계가 조용해졌다

그는 마지막 출근날, 조용히 사무실을 정리했다.
명함첩은 그대로 책상 서랍에 두고 나왔다.


"이제 필요 없잖아."
혼잣말을 하며 웃었지만, 손끝이 떨렸다.


'축하드립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흔한 기념 케이크도, 꽃다발도 없었다.


묵직한 서류봉투 하나.
그 안에는 퇴직금 정산서와 국민연금 수령 예정액 안내문이 있었다.


은퇴 이후, 삶은 숫자로만 환산되었다

평균 수명 83세.
예상 생활비 월 250만 원.
현재 예·적금 2억.

엑셀 시트에 넣어 계산하면 분명 부족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건 '평균'일 뿐이었다.
그의 삶은 평균이 아니었다.


고정 지출, 가족 지원, 의료비, 모임 회비, 취미 생활...
달마다 지출이 늘어났다.
그 많던 월급은 어느새 자산을 갉아먹는 습관으로 바뀌었다.


'노후준비'란 단어는 늘 남의 이야기였다

그는 늘 지금을 살았다.
성과를 내고, 실적을 맞추고, 회의를 주도하며.
그 바쁜 와중에 연금은 먼 이야기 같았고,
퇴직 후 계획은 '이따 생각하자'는 일이었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퇴직했지만, 나는 아직 거기 살고 있어."


의미를 물을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엔 '당신은 아직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었다.


회사를 벗어난 후, 그는 자신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엔 허탈했고, 그다음엔 두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는 깨달았다.
이제 진짜 자신만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서점에 가고, 걷기 시작하고, 조용한 카페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는 늦게야 진짜 삶을 시작했다.


조금 느린 출발이었지만,
이번엔 속도를 경쟁하지 않아도 되었다.


퇴직은 끝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가는 시작이다

노후 준비는 숫자가 아니다.
그건 '나는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고민하는 시간이다.


그는 지금, 매일 아침 새로운 퇴근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명함도 없이도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사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이 이야기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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