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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나는 지쳤어

그렇다고 전부 포기할거냐?

by abecekonyv
Kitsch 키치 (중략)... 프랑스에서는 오락을 진정한 예술과 대립시킨다. 가벼운 예술 대對 무게 있는 예술로. 마이너 예술 대 메이저 예술로. 하지만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벨몽도의 범죄 영화에 짜증을 낸 적이 없다! 나는 그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 영화들은 정직하며, 아무것도 가장하지 않는다! 반면, 차이콥스키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바랜 장밋빛 라흐마니노프, 할리우드 명화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닥터 지바고>(오 가엾은 파스테르나크여!). 바로 이런 것들이 내가 진심으로, 마음 깊이 혐오하는 것들이다. 또한 나는 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작품들에서 지금도 나타나는 키치 정신에 점점 더 화가 난다. <89개의 말> 밀란 쿤데라, 김병욱 옮김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분야의 음악이란 서양 클래식 음악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것을 건드리지 않았던 것은 나의 빈약함에 있다. 사실 클래식 음악을 일찍이 듣고 살았지만, 지루하기 그지 없는 문헌들을 뒤지기를 멈칫하게 했다. <음악 op.15> 정도의 제목이 주어지고 그것을 평론하지만, 나는 그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면 공감하기란 힘들다. 그것은 문학 평론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경험하지 못한 작품에 대해 평론을 먼저 읽는게 맞는걸까?' 하는 생각은 끊임없이 든다. 그리고 '그것을 읽기 위해 내가 음악을 굳이 들어야하나' 라는 생각도 지속적으로 든다.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단점도 존재한다. 내가 주체적이라는 말을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 종속시켜 남용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기준이 완고하다면 당연히 가끔은 타인의 이야기가 듣기 싫어진다. 따라서 나는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읽기 위해서는 듣지 않았다. 참 말 안듣는 아이이다. 남들 보다야 많이 들었겠지만, 전문가들 보단 많이 듣지 않았을것이다. 나의 전공은 클래식 피아노이다. 대략 50개 이상의 글들을 써내며 밝히진 않은건 나의 부끄러운 빈약함이다. 그러나 이렇게 산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진 않는다. 나는 항상 해야하는 일 이외에 다른 것들을 한다. 그것이 나를 살게하기 때문이다. 다시 이것에서 벗아나면 피아노가 다시 내 삶에 집중될 거라 예상한다. 청개구리의 삶 같이 보이지만, 나 역시 스스로에겐 충실한 것이다.


피아노라는 것을 겉으로 보다보면, 건반이 가벼워만 보인다. 그리고 직접 눌러보면 가볍다. 그러나 가볍지 않다. 이게 무슨 말인지는 피아노를 조금 배워본 사람이라면 아는 말이다. 처음 피아노를 연주하려면 소근육들을 단련시켜야 한다. 피아노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손은 피아노에게 유약하기 그지없다. 처음 곡을 완주하다 보면 손이 아파올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피아노 테크닉만 어느 정도 완숙하게 쳐내기 위해서는 나는 대략 10년 정도를 바라본다. 사실 5년 정도여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심지어는 2년도. 혹은 더 짧은 시간 안에. 그러나 짧은 시간에는 테크닉의 경험이 부족하다. 테크닉의 도달이 아무리 빠를지라도 치기어린 테크닉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의 피아노 인생에서 테크닉은 신체조건 덕에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유치하기 짝이없는 테크닉이라고 항상 생각했던 것 같다. 미숙하지만 키만 큰 초등학생의 느낌이랄까. 경험없는 어른의 모습이랄까. <쇼생크 탈출의> 죄수들이 사회에 나와 부적응하는 느낌이 내 손에 느껴졌다. 그것에서 벗어난 것은 대학 때 부터이다.


그렇기에 테크닉은 피아노 연주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에 기교파 피아니스트, 혹은 작곡가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내가 이야기할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 둘은 피아노계에서 남성적인 강인함으로 대표된다. 리스트의 화려한 외모와 장신의 키, 러시아 남자의 이상향적인 거구와 매우 큰손. 둘은 대충 이렇게 떠오른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인지 형이상학적인 음악의 측면에선 저평가 받는 느낌도 강하다. 그러나 나의 글은 이것을 탈피하고자 한다. 둘도 사실은 자신들의 이러한 측면을 인식하기라도 한 것인지 후에는 어떤 행동으로 나타난다. 리스트는 갑자기 신부가 되었다. 라흐마니노프는 기교를 과시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둘의 남성적인 화려함과 힘의 차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에 기교의 대표 명사로 군림하고 있다.


내가 인용한 '키치'에 대한 밀란 쿤데라의 인용은 이런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사실 밀란 쿤데라를 자세하게 읽지 못하였기에 맥락에 대해 조심스럽다. 몇 권의 책을 읽어보았지만, 그것들에 대해 피상적인 이해로만 다가오는 것 같다. 따라서 나의 맥락에서만 풀어보는 것으로 한정한다. 키치는 밀란 쿤데라가 자신을 화려하게 비추는 거울로 비유한 적이 있다. 자신에게 아첨하는 거울말이다. 도라에몽의 도구 중에도 그런게 있다. 거울이 비추는 나의 모습은 완벽하고 화려한 외형이다. 따라서 자신에게 자아도취하게 만든다. 자신의 유약함을 속인채 외양만을 갖춰나가는 이런 부조리함을 밀란 쿤데라는 분개하는 것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지극히 서정적인 음악으로 유명하다. 자신도 거인의 풍채를 가지고도 지극히 섬세하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달 박사의 치료를 받고 헌정했다는 피아노 콘체르토 2번을 한번 들어보라. 그것은 콘체르토 1번의 실패를 추모하는 미사곡 같이 들린다. 앞으로의 환희를 바라보기 보다는 자신의 서정에 빠지는 경향이 강하다. 아무리 3악장의 확정적인 두드림으로 끝을 맺을지라도 말이다. 쿤데라에게 라흐마니노프는 '바랜 장밋빛' 이라는 수식이 걸맞는다. 명량한 아름다움. 혹은 멘델스존 같은 명량함 보다는 퇴폐에 가깝다. 다자이 오사무에게 미시마 유키오가 말한 '도수체조 한 번이면 그딴 우울증은 한 번에 나을 수 있다.'라는 조소를 살펴보자. 지금까지 논의 했던 어떤 키치의 의미와 맥락이 같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연주하기 매우 어렵다고 발렌티나 리시차가 이야기한 적 있다. 그녀는 라흐마니노프를 때로는 좋아하지만 연주해내기 싫다고 까지 표현한 유튜브 영상이 있다. 그것은 나도 이해가 되는 말인데,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은 준비가 까다롭지만 연주에서는 너무나 쉽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라흐마니노프의 멜로디나 반주는, 상행이든 하행이든 관계없이 파도를 치는 음표의 연쇄가 많다. 단순히 악보를 바라보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한음 한음 고심해야하는 피아니스트에게는 연주 전 굉장한 노력을 요한다. 그것을 넘어가기가 힘이 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라흐마니노프의 성격상 그것들을 한번에 써내려간 것이지 한음 한음을 고민해서 써내린 것 같진 않다. 따라서 연주자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해내야하는 오랜 관습에 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리스트는 어느정도 명랑하다. 그는 가난한 태생에 그렇기에 생활력이 강한 음악가이다. 성공도 해본 자수성가한 음악가. 삶의 고난을 이겨본자는 두 가지 흐름으로 이어간다. 과거의 관습에 항복하여 정신마저 가난해지거나, 오히려 남들보다 환희로 가득찬 삶을 살게 된다. 리스트를 흔히 쇼팽에 비해 음악성이 밀린다는 평가가 많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문학이나 자신의 여행에서 영감 받은 작품이 많다. 쇼팽은 음악의 순수성에 기대는 측면이 많다면, 리스트는 적어도 삶에 관여하는 음악을 써낸다. 나는 외려 리스트가 친근하다. 음악의 수학적 추상성이 돋보이는 것은 음악의 순수성을 얼마나 연역하느냐이다. 바흐의 경제적인 음악을 추종했던 쇼팽은 이에 속한다. 그러나 삶의 때가 묻은 음악이라고 표현한다면 리스트가 서운해할까. 사실 그는 이런 표현을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쾌락과 삶을 이겨내본 환희를 뉘우쳐 신부가 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진심이었다는 표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가 농민의 삶을 이상향으로 여긴것을 생각해보라. 그는 자신이 가진 귀족적인 것들을 싫어하였다. 그러나 귀족적인 것들을 농밀하게 즐겼기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전쟁과 평화>같은 소설의 묘사에서 드러난다. 농민을 추종하지만 끝내 농민의 죽음을 모른 채 잠이든다. 사실 리스트는 이런 축에 속한다.


따라서 리스트의 음악은 라흐마니노프마냥 서정에 갇히지는 않는다. 아무리 음울한 음악일지라도 명랑함이 뭍어난다. 흔히 음악에서 명랑함이라고 말한다면 멘델스존을 떠올린다. 그러나 리스트는 그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명랑함에 속한다.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 토텐탄츠,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를 편곡한 것, 메피스토 왈츠 등. 모두 죽음이 주제를 관통한다. 그러나 그의 곡들이 화려한 기교뿐만 아니라 자신이 평생을 개발했던 음악의 명랑함을 유지한 상태라는 것을 대부분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리스트는 살아내는 음악가다. 돈을 벌고 사회생활을 하며 속으로 욕을하지만, 자신의 어린아이 같은 기질을 포기하지 않은 채 나아간다. 흔히 사회생활 하면서 돌아볼 때, 그 때는 순수했던 시절이라고 떠올린다. 그러나 위에서 나는 삶의 고난에 대해 두 가지로 흐른다고 말 한 적 있다. 사실 순수를 잃는다는 것은 애초에 순수한 것이 아니다.


리스트는 그렇기에 키치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모더니즘이라고 명시해 놓았지만, 그래도 쿤데라가 낭만주의 음악가 리스트를 지목하지 않은 것을 보면, 리스트는 키치라는 오명에서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눈에도 리스트는 적어도 키치라는 말을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는 합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고 그의 음악성이 쇼팽에 비견된다고도 느낀다. 그가 개발한 음악의 패턴은 기이할정도로 독창적이다. 나는 서유럽을 떠올릴때 가끔 리스트의 음악이 공명하는 것을 느낀다. 플로베르가 그린 유럽을 바라볼 때 리스트의 음악이 내 속에서 울린다. 적어도 나의 음악세계의 청사진은 리스트였기 때문이다.


라흐마니노프를 다시 생각해보자. 그는 쇤베르크가 나타난 시대에도 후기낭만이라는 이름이 붙을정도로 낭만적이고도 고답적인 방식을 고수했다. 그를 화려한 것만을 바라보게 한다는 평도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그가 고수했던 방식을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본질적인 기질에 있다. 차이콥스키는 법률을 공부하면서도 아버지의 훈수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동성애적인 성향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차이콥스키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천착해들어간다. 그의 음악은 이런 면에서 수학적이다. 감성적인 수학. 라흐마니노프도 이에 속한다. 그의 우울증은 남들에게 이해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선배 리스트를 거의 능가하는 수준의 기교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쳐내리지만, 그것은 기교에 대한 조소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외부에 대한 조소말이다. 자신의 내면에 비하면 현실세계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도로 초지일관한다. 그의 인생에서 이 태도가 변하진 않는 것 같다. 따라서 그의 음악은 그림을 볼지라도 내면으로 천착한다. <죽음의 섬>을 쓸 때도 그는 자신의 내면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극복하기 힘든 태생인지도 모른다. 키치를 극복의 측면에서 바라보진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라흐마니노프에게 키치라는 말을 탈피하기 위해선 극복을 요구한다. 따라서 그의 음악이란 생상스나 쇼팽처럼 음악의 순수성에 자신의 음울한 감성을 더한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려야한다.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다른 경험을 해야한다. 그러나 그에게 다른 경험이란 허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리스트의 경험은 화려하고도 강렬했고, 깊은 후회라는 상흔을 남긴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에겐 허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경험들을 물리치는 기질의 강력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들의 피아노 기교는 다르다. 장식음과 어떻게 보면 바로크적인 것이 튀는 리스트의 기교, 아르페지오와 화성의 오묘함을 밀고나가면서 그것을 구현해내는 라흐마니노프의 기교는 다르다. 그들의 목적도, 그들의 취향도, 그들의 벡터도 다르다. 리스트의 방향이 외부라면, 라흐마니노프의 방향은 내부이다. 리스트가 신부가 되어 내부의 신에 무릎 꿇을지라도 그의 방향은 외부에 가깝다. 반면 라흐마니노프가 연주를 하며 성황을 이뤄도 그의 벡터는 내부에 가깝다. 이런 차이는 작곡가의 타고남, 환경, 태생의 조건이다. 따라서 함부로 그것을 평하기란 힘들어 보인다. 나 역시도 그들을 존중하며 글을 쓸 수 밖에 없다.


타고난 것들을 극복하기란 불가능해보인다. 그러나 그것들 속에서도 무엇을 만들어 낼 지는 그들의 인생이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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