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정을 초월하여
Message 메세지 - 오 년 전, 스칸디나비아 번역자가 내게 <이별의 왈츠>를 펴낸 출판사 사장이 이 책의 출간을 무척 망설였다고 털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모두 좌파거든요. 당신의 메세지를 좋아하지 않아요." "무슨 메세지 말인가요?" "낙태를 반대하는 소설 아닌가요?" 물론 아니다. 사실 마음속 깊이 나는 낙태를 찬성할 뿐 아니라 낙태 의무화에도 찬성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오해가 생긴 게 오히려 기뻤다. 소설가로서의 나의 의도가 성공했으니 말이다. 나는 상황의 도덕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예술가로서의 소설의 본질, 즉 아이러니에 충실했다. 아이러니는 메시지 따위에는 관심 없다! <89개의 말> 밀란 쿤데라 김병욱 옮김
사실 모든 것의 결과라는건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이 도달하는 과정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의 시점이 결과를 특정해준다. 그 때 그 때마다의 결과라는 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결과라는 것은 제도적인 종결 뿐만아니라, 일상의 종결이다. 우리는 이러한 수학적인 범위를 특정하는 것에 항상 관심을 갖는다. 어디까지 우리의 힘이 미치는지, 우리의 노력이 어디까지 도달 할 지를 가늠하며 따져본다. 그러나 그것의 한계를 마주한다. 무한한 실평면 위의 숫자들에 어느 점을 찍어도 그것의 상계는 존재한다. 우리는 무한한 토대 위에서 우리의 힘을 가늠한다. 그것은 항상 좌절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계를 생각한다는 것은, 혹은 나의 바깥을 바라보는 것은 단지 벽을 바라보는게 아니다. 그것은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벽을 마주한 이상 우리의 도달은 멈추게 된다. 물리적으로 벽을 넘어서던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인식은 거기서 멈추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벽에 대한 생각이라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한한 토대 위에서 좌절하고, 무한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보면 동등하다.
전쟁 영화나 소설같은 것을 보다보면, 전쟁의 메세지를 전한다는 느낌보다는 갇혀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전쟁은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내뱉는다면 선전이다. 따라서 전쟁을 다룰지라도 그것의 주안점은 전쟁보다는 이야기에 치중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초반 상륙작전에 잔인한 묘사를 그려내지만, 영화의 내용은 그 이야기 안에 갇혀버린다. 따라서 잔인한 소재를 다룰지라도 그것의 메시지라는건 우리의 해석이다. 우리는 흔히 소재의 극단성이 메시지를 부과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인지도 모른다. 단지 나의 심상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심증이지 물증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나 소설에서 무엇을 들어내야 하는지는 인내를 요한다.
이야기란 갇혀 있다. 우리가 그것이 꺼내어 적용되길 바라는 것은 희망 사항에 그친다. 장 폴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앙가쥬망engagement을 외칠지라도, 문학이란 그것이 닫혀있는 성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우리는 폐포의 선분을 흐트러뜨리는 정도 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문학은 내적 아이러니에 의해 스스로 자신을 연성해내는 의미의 생성원이다. 이야기의 의미라는 것은 무한하다. 따라서 그것의 텍스트는 무한한 변용이 가능하다. 위상 수학적인 공 처럼, 그것은 찌그러뜨리고 펼치고해서 가능한 범위의 모든 형상을 자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종수genus는 정해져 있다. 따라서 그것의 변용 역시 제한된다. 텍스트의 무한한 변용이 가능하지만, 그것 역시 형태라는 무한한 토대 위에서 상한이 정해진다. 따라서 우리의 변용이라는 것은 제한된 움직임이다. 이야기가 무한하다면 진실된 앙가쥬망이 실천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는 말이다. 소설의 논리는 그 소설 안에서만 합당하다. 우리의 논리 체계는 외부를 따지기란 불가능 하다. 우리는 아쿠아리움에 둘러쌓여 있다. 저기에 돌고래도 있고, 남쪽 먼 나라에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살랑살랑 헤엄친다. 그것의 촉감, 맛, 향, 그것에서 촉발 되는 다양한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단지 우리의 시각만이 저기에 무언가가 있다고 알려준다. 우리의 소설 읽기란 아쿠아리움과 같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란, 돌고래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아이의 눈과 같다. 그것을 결코 만질 수는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단지 바라본다는 것은 인내를 요한다. 그것을 감각하기를 포기하는게 제일이지만, 그것을 포기 할 수 없다면 인내해야한다. 그것을 이해한다는 이성적인 말 보다는, 그것을 품어낸다는 생각이 옳은 것이다. 아쿠아리움의 돌고래는 우리의 유식세계에 속한다. 우리는 돌고래를 만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언젠가는 그것을 만질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타인이란 인내해야 하는 것에 속한다. 외국어를 배울 때 품는다는 것을 여실히 느낀다. 외국어는 이해하고 암기하는 영역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것은 부차적이다. 그것을 품는다는 것은 아무생각 없이 문법서와 사전을 읽는 것을 말한다. 그 행위에는 이해와 암기가 모두 속해있다. 그러나 가끔은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것을 나의 일상으로 품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비효율적인 방식이라고 나의 이성은 경고한다. 이것이 지금 굉장히 지루하다고 나의 가슴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요동친다. 그러나 천천히 읽어나간다. 그것의 효용과 불편은 나에겐 의미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외국어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을 믿어야하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다. 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