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발을 딛는 바로 이 곳이 꿈이다
"응, 나 역시 아직 도락에 실증이 난 것은 아니야. 하지만 놀러 나가 본들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는가. 나는 이제 흔해 빠진 거리 여자들이나 술맛 같은 것은 그저 역겹기만 해. 참으로 유쾌한 일이 있기만 하다면야 언제라도 함께 어울려 놀러 나가겠지만......" 귀공자의 시선으로 보면 일 년 내내 거기서 거기인 유곽 여자에 빠져 천편일률적인 방탕을 구가하는 악우惡友들의 하루하루가 오히려 딱하기까지 했습니다. 만일 여자에 빠지기로 하자면 평균치는 넘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만일 방탕을 구가하자면 늘 새로운 방탕이었으면 좋겠다, 귀공자의 마음 속에는 그러한 욕망이 불타고 있었지만 그것을 만족시키기에 알맞은 대상이 눈에 띄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인어의 탄식> 다니자키 준이치로 양윤옥 옮김
영재아 전문가들이 주로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영재아에게 환상 소설을 많이 읽히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유튜브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완전히 이해하고서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것이 무엇을 말 하는지는 느낌이 온다. 평생의 기반이 되는 유년기에 손에 잡히는 물질과 현실보다는 부유하는 세계에 집착한다는 게 좋은 것일까. 하물며 남들보다 자질이 좋은 아이라면, 현실의 따분함 보다는 이야기가 가지는 연역의 세계가 더 흥미로울지도 모른다. 환상이란 다름아니라 현실과 매개한다는 것을. 그러나 현실만을 깔끔하게 싹 지워버려 그것에만 집착 할 수도 있다. 장님의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닐까. 보르헤스는 눈이 멀지라도 단편 소설을 써내렸다. 읽었던 책들을 기억에 의존하고, 그것들을 분류하고, 수학적으로 이야기를 직조해 내었다. 환상이란 현실을 매개로 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을 의도적으로 지울 수도 있다. 접경의 삶이란 나는 항상 귀신같이 우리 곁에 멤돈다고 생각한다. 어디서 부터 꿈이고 어디서 부터가 현실이란 말인가. 내가 음악에 심취하면 이곳이 무대이다. 아침의 피곤함을 이끌고 산장을 나와 풍화되어 깎여나간 절벽을 바라본다. 아침의 보슬 비가 나의 뺨을 간지럽히고 눈썹위로 송글송글 맺힌다. 아침 7시 경의 산 속이란 풍류란 무엇인가 보여준다. 서유기의 서왕모가 사는 하늘의 영토에 직접 가지 못하더라도, 이 곳이 바로 구름위의 세계인 것이다. 이 곳이 꿈인지는 내가 정한 것이다. 분홍 구름이든, 초록 구름이든. 서까래가 현실의 건축 보다 내가 더 낫다는 듯이 굽이치고, 건물을 받치는 나무 기둥이 나의 키에 열 배쯤은 되어 보인다. 현실의 건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과장된 환상의 세계는, 다름아니라 내가 정한 것이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니 굴원屈原은 자연에 은거해버린다. 자연에 가지 않더라도 새들의 울음소리와 축축함 등은 느낄 수 있다. 그 곳으로 굳이 간다는 것은, 자신의 의도를 현실세계에 드러나게 하고 싶은 완고함이다. 환상이란 건 현실의 영토에 파종한다. 대부분은 씨앗 조차 깨지지 않는 불발탄 같은 종자들이다. 그러나 가끔은 발아하여 꽃을 피우기도 한다. 그 식물은 분명 마약의 재료에 쓰여질 것이다. 현실을 마주보지 못하게 하는, 양귀비의 독성을 분명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학문 조차 가끔은 환상이다. 물질의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점, 선, 도형으로만 추상 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경계를 가지지 않는, 다시 말해 구역을 명시하는 폐포가 존재하지 않는 도형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폐포가 바다에 침식당하는 모래 성 마냥 흐트러진다면, 우리의 구분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그것은 영원히 수렴해나아가는 프랙탈처럼, 혹은 답은 정해져있지만 무한히 달려나가는 리미트의 성질처럼, 단지 상태로만, 혹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힐베르트는 시인의 심성이 없으면 수학자가 되지 못한다 한다. 그것은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독초를 가까는 정원사의 인내력이 없다면, 수학이란 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현실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 세계에서 그것을 조합하고 해체한다. 분재를 현실에서 깨드릴 수는 있어도, 다시 복구하지는 못한다. 그것이 오로지 가능한 것은 우리의 마음 속이다. 마음 속에서 분재를 깨뜨리고, 분석하고, 다시 조합해 본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을 매개로하기에 영원한 환상은 아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환상은 존재하는가? 사실 태어나면서 부터 장님일지라도, 우리의 감각만이 살아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현실을 지우기란 불가능하다. 기관없는 신체가 존재한다면, 우리의 인식은 정말로 가능성의 영역에 존재할까. 각기 새로운 우주에서 살게 될까. 인간의 생명조차 하나의 소우주라지만, 우리의 삶은 새롭지 않다. 그것을 모른다기 보다는 애초에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혹여나 늙는다면 나의 세계가 펼쳐질런지 염원해보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고 현실의 따분함만이 남는다는 걸 깨닫게 된다. 외려 우리의 감각은 점점 견고해진다. 물질 세계에 살다보니 우리의 감각은 하나로 뭉쳐져서 괴물이 된다. 더 이상의 만족은 없다고 말한다. 노욕의 무서움은 극단성에 있다. 이미 세상의 환락이란 환락은 모두 맛본 노인이 가장 무섭다. 이 세상에 더 없는 절정을 느낄지라도, 우주 바깥의 쾌락을 염원하는 자의 슬픔이란 이루 말 할 수 없다. 새벽 3시 정도에 깨어서 해외여행을 갈 준비하는 사람들은 환상이란 무엇인지 여실히 느낀다. 택시를 타고, 혹은 자가용을 몰고 공항으로 내달리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자고 있는 새벽 시간의 활주로를 내달리는 비행기를 그들을 이미 타고 있다. 인천 공항으로 내달리는 자동차의 속도감은 환상 속으로 가속하는 몰입을 닮았다. 바다의 짠내는 창문을 열지 않으면 나지 않는다. 현실의 벽을 마주하기 싫다는 우리의 저항인가. 아니면 오로지 몰입하여 꿈 속으로 내달리는 것인가. 그것을 분간하기란 구별하기 힘들다. 해외 역시 누군가들에겐 삶의 터전일진데, 우리의 환상은 왜이리 가속되는 것인지. 사실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봐왔던 환상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그것이 현실에 사영하여 자리매김 할 때 비로소 우리는 환상의 씨앗이 만개한 것을 보게 된다. 역시 내가 예상한 대로야. 사실 예상 한대로 될 수 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이 환상이란 우리의 현실에 매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확인하고 싶다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아편을 만든다. 현실을 괴롭다고 잊기 위해 환영을 만든다지만, 우리의 인식이 환영과 같은걸 가끔은 어쩌라는건지 내팽겨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마음 공부가 자기합리화라면, 저 바깥에 떠도는, 기준이 되는 영혼들도 바깥의 자기합리화일 것이다. 사회라는 게 주체가 아니라지만, 마치 주체처럼 기능하기에 주체를 외려 위협한다. 인간의 군집을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가. 리바이어던의 표지마냥 우리는 하나의 전체주의적인 하나의 인간을 특정 할 수 있는가. 소비에트나 나치, 혹은 이탈리아 파시즘, 이슬람 극단주의 마냥 우리는 하나의 사람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인식이 단지 귀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해버린다. 현실의 경계를 흐트러트리는 발걸음은, 우리의 생각보다 평상적이다. 회사에 출근하는 직장인의 발걸음, 외려 깔끔하고 도회적으로 치장한 여자의 발걸음이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녀의 OOTD이다. 그들의 깔끔함이 외려 환상이다. 하나 하나 내딛는 발걸음이 환상의 문턱 앞에 선다. 무한히 수렴하는 급수의 점들을 보는 것 처럼. 오히려 환상은 술에 비틀거리는 주정의 형태가 아니라, 이런 흔해빠지고도 딱 떨어지는 구두의 발걸음과 닮아 있다.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깔끔함을 원한다고 한다. 그것은 환상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 남자만의 공간이 지극히 깔끔해 떨어진다면, 이 사람의 세계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나는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어도, 그것이 어떻게 역학적으로 작용하는지는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외려 깔끔함이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이 엔트로피를 역행하기 때문이다. 지저분해지기만 하는 세계 속에서 외려 깔끔함을 추구한다는 건 환상이다. 귀신들은 사람을 반대로 따라한다. 손등으로 박수친다던지. 지나치게 깔끔하다면 결벽을 의심하게 한다. 그것이 변태적일지도 모른다는 묘한 흥분감을 타인에게 심어주는 것 같다. 이렇듯 우리의 환영들은 도처에 깔려있다. 도시의 관능은 직선에서 나온다. 이제는 곡선이 아니라 직선의 시대이다. 과거 홍수로 범람했던 강남과 잠실의 진흙탕은 매끄럽게 떨어지는 직선의 빌딩 숲이 되었다. 직선은 자연을 역행한다. 그러나 외려 외계의 관능이 우리를 매혹한다. 세련되고 도회적인 삶을 동경하게 한다. 셀러리맨들의 고단함은 이상향이 되었다. 도심을 걸으면 이 곳이 환상이라는 것을 꺠닫는다. 아직도 세계 도처에는 이런 빌딩 숲을 꿈꾸지도 못하는 곳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환상 속에 살기에 이 곳이 우리의 환경으로 자리잡았다. 누군가에게는 우리의 터전이 곧 환영일 것이다. 귀신은 과학으로 물리쳐졌지만, 이런 논리적인 도출 속에 언제나 숨어 있다. 귀신이 두려운 이유는 갑자기 놀래키기 때문이다. 귀신들은 언제나 뒤에 은폐해 있다. 그것이 두려운 이유는 우리의 환상을 깨우는 경종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환상에 산고 직접적으로 말해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유하는 사회생활이 이미 우리의 환경이다.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또 다른 환영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넘실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