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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령

by abecekonyv

20세기 초반의 논리실증주의자들과 영국 경험론 전통의 철학자들이 하던 말들이 있다. 학문이나 철학이나 뗏목과 같아서 시대에 따라 유지 보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은 어렵지만, 내게 이런 식으로 다가온다. 유기적인 발전, 현실과 관계하여 뻗어나가는 사상의 모험. 이들의 문체는 지금의 미국과 닮아 있다. 그들을 묶어서 영미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풍토에서 길러내는 철학이란 왜곡되지 않는다. 관념이 있을지라도 분석하고 논리로 해체한다. 수학은 우리에게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단지 문제를 푸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논리의 극한은 자유로움이 되어버린다. 수학자들의 뇌가 어떤 논리의 메카니즘으로 진화한 것인지, 논리의 속성이 극한의 자유로움에 결국은 종속되는지는 모른다. 그들에게 왜곡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왜곡이란 자신들의 왜곡이다. 자신을 왜곡하는 것은 현실을 왜곡하는 것과는 다르다. 가진 것들에 대해서만 왜곡하기 때문이다. 돌에 무한한 관념을 투영하지 않는다. 영어라는 플랫한 언어를 기반으로 공통감각을 끌어낸다. 누구나 이 시대에 영어를 배운다. 영어를 말한다. 그렇기에 영어는 형태론적인 변용보다는 발음의 차이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이 시대의 라틴어라고들 흔히 말한다. 그러나 영어의 발음은 라틴어 이상의 창출을 해낸다. 단지 언어를 지키는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그들의 형태는 완고하다. 영어는 따라서 무한하지만 기본적인 논리체계는 공통감에 종속되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민족적인 특징에만 결부되지 않고서 말이다. 우리는 영국에 대해 잘 모르지 않은가.


그러므로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는 어려운 문제이다. 나의 아름다운 한국어. 보통 모든 나라가 이렇게 말한다. 한국어를 독일어로 바꾸어도 문제 없다. 그러나 반골 기질이 심한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굳이 나의 언어가 아름다울 이유는 무엇인가? 아주 합당한 질문이다. 이들의 질문을 단지 청개구리 심보라고 욕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런 의심을 할 줄 아는자는 사실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자들이다. 자신의 언어의 추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언어의 장점도 명확하게 인식한다. 언젠가는 자신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장점이라고 깨닫는다. 내가 이미 그렇게 사용하고 있었다는게 이국의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미국의 시들은 일상어의 예술이다. 그러나 그들이 빚어내는 시들은 분명히 우리가 통속적으로 말하는 추상적인 예술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는 공통감과 자신들의 민족적 특질을 한 데 엮어낸 것이다.


문체는 작가의 본령이다. 따라서 문체를 보면 그 사람의 부분을 알게 된다. 민족을 알고, 사상을 알고, 취향을 알고, 생각의 구조를 알게 된다. 따라서 문체에 대한 고민은 나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문체에 대한 고민은 메타-글쓰기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문체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는 고심해야 한다.


문체가 나라면, 적어도 문체의 건강성이 나의 건강을 의미하기도 한다. 문체의 건강함이란 무엇일까. 사실 나는 현실과 얼마나 관계하느냐에 중심을 둔다. 지나치게 부유한 관념들을 붙잡아 내는 것. 혹은 지나치게 사물을 붙잡아두려고 하는 것. 관념과 물질을 다루는 작가의 일관적인 태도에서 건강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문체의 건강검진이다. 상징주의 시인들의 방탕함은 그들의 문체와 닮아 있다. 동성애자들의 글들에서 그들의 취향을 발견한다. 탐미주의자들의 소설에서 그들의 페티시를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왜곡을 좋아한다. 그들은 사물을 바로 보지 않는자들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물을 그대로 보는 사람들도 건강하지 못하다. 물질에 대한 집착이 무한하게 증식된다. 소재의 갈망을 만들어 낸다. 글을 쓸 때에 생각보다는 소재에 치중하기에 글이 다채로울지라도 무엇을 엮어낼지는 빈약해지게 된다. 정신병리학적인 회피가 가능할지라도 그들은 강박적인 수집가이다. 물질만이 그들을 풍요롭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의 균형을 어떻게 발휘하는지가 건강의 척도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다.


생각은 재는 행위이다. 사물을 재는 자와 같다. 모든 생각은 측도론이다. (dM) 미분 형식의 변용이 그들에게 자유로움을 준다. 수학이라는 공통체계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앞서 말했듯 논리의 극한은 자유로움이다. 측정도구의 자유로움. 관찰자의 자유로움은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비정형적인 토대위에 논리적인 것을 쌓은 것이다. 논리위에 비정형적인 것들을 담을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서 있는 토대라는 것은 비정형적이기에, 애초에 우리는 자유로웠던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가늠해본다. 선풍기의 바람 세기가 얼마나 될지 약풍, 미풍, 강풍을 모두 눌러보며 재 본다. 감각은 수량화가 불가능할지라도, 우리의 마음 안에서는 적당한 양으로 변환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만 숫자놀음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수치를 마음 속에 품지만, 우리는 타인과 그 숫자들을 공유할 수는 없다. 측정도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치를 쓰는 사람과 센치미터를 쓰는 사람들은 숫자 관념이 다르다. 인치를 쓰는 사람들의 두루뭉술함을 센치미터를 쓰는 사람들은 비관한다. 인치를 쓰는 사람들은 그들의 갑갑함에 진절머리가 난다. 인식의 차이란 따라서 수학적인 것이다.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냐가 아니라, 얼마나 바라보는지의 차이가 아닐까. 어떻게(why)가 아닌 얼마나(How)의 차이. 어떻게라는 말은 너무나 다른 세계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얼마나의 차원에서는 우리가 적어도 공통된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모든 문화가 곡률이 강하다는 말은 틀린말이다. 곡률이란 문화의 농도이다. 그것의 축적이 얼마나 되었는가를 말한다. 얼마나 많은 문학 작품이 쌓여있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말의 의미가 축적이 되었는가. 우리는 함부로 말하기 힘들어하는 것 뿐이지, 문화의 양적인 측면에 집중하지 않는다. 책 한권으로 문화가 위대해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적절한 양의 서적이 쌓여야 한다. 그것들을 어떻게 쌓였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쌓였냐의 문제가 현실의 문제이다. 문화가 어떻게 쌓였냐는 질문은 그것의 관계에 치중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얼마나 쌓였냐의 문제는 물리적인 대상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관계만을 생각한다면 문화의 발전은 없다. 그리고 양적인 측면에서만 집중한다면 중력은 생기지 않는다. 우리는 강가에 쌓인 조약돌에게 어떤 질량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행성들의 중력에는 관심을 가진다. 따라서 관계성이란 적어도 동등하게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에 대한 사유는 따라서 태도의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질적인 깊이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길이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문화의 깊이를 만들어 낸다.


우리의 독서는 따라서 깊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단어 하나에 플로베르와 발레리를 떠올릴 수 있는 역량을 만들어 내는 거이다. 사실과 상징들을 모두 환기 시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균형이 우리를 건강하게 한다. 인간이 생각하는 갈대와도 같다는 파스칼의 말마따나 우리는 잠시 기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는 돌아오게 된다. 한 번의 입맞춤이 영원하지는 않다. 다른 사람에게 그 입술은 전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 앞에서 울게 되지만, 그것이 쓸모없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깨닫게 된다. 따라서 건강하다것은 울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매번 느끼게 된다. 자신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들기 시작한다. 그것을 무화시킬 수 있는 자들은 부처의 경지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긴대로 살라는 말들을 듣는 것이다. 우리의 근본은 변화하지만, 그 특이점들을 항상 피해간다. 우리는 그렇기에 다시 원래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복귀는 이전과는 다르다. 우리가 의미의 층위를 쌓아가는 동안 깊이를 만들어 내듯이, 우리의 무한한 특이점 돌아가기의 행위 속에서도 우리는 양量을 헤아린다. 한바퀴를 돌든, 열바퀴를 돌든 복소평면에선 동일하다. 그러나 몇 번을 돌았느냐의 차이는 우리 인식 속에 남게 된다. 우리의 수학안에는 남게 된다. 지수함수의 지수에 나타나는 회전의 역량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결과는 같을지라도 함수가 얼마나 노력하는지는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 어떻게 기능하는지는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열번을 돌든 백번을 돌든 나타나는 효과는 같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회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린 그것이 극복되게 힘든 절망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따라서 카프카의 말 처럼, 우리의 독서는 얼어붙은 강을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말은, 사실 특이점에 흡수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끼는 블랙홀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만은 우리의 내면 안에 남게 된다. 내가 가진 도끼가 블랙홀에 무화 될지라도, 우리는 그런 행위를 한번은 해보았다는 생각만은 가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변한 것이다. 의미의 창출은 블랙홀을 증오하는 것이다. 무한한 시도 끝에 블랙홀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깨닫지는 않는다. 0번의 시도에서도, 블랙홀을 응시하면서도, 저 괴물이 나를 삼킬 것이지 내가 끝장 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인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지는 않는것 처럼, 우리는 뭐라도 하는 것이다. 무인도에서도 사람은 발전한다. 물질이 없어도 인간은 발전한다. 그러나 그것이 건강하지 못한 것은 적절한 물질의 충족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우리는 발전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발전은 소재의 교접에만 불과한다. 경험은 모든 것을 말하진 않는다. 둘의 합일 만이 우리에게 예술과 학문을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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