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되지 않을지라도
인생에서 문제라는 것들은 정녕 해결되는 것들일까. 아니면 그것에 단지 익숙해져만 가는 것일까. 그것은 알 수 없다는 애매모호한 말들로 치부할 수도 있다. 혹은 나아진다거나 변함이 없다는 선언으로 치부 할 수도 있다. 인생의 문제라는 것은 특이점이다. 그것을 무한하게만 돌아갈 뿐, 그것을 거치지 않는다. 무한하게 회전하는 각운동량의 힘을 느끼면서도 문제라는 것들은 항상 거기 그대로 나사처럼 박혀있다. 나선형(helix)의 구조는 2차원에서 축을 하나 더 필요로 한다. 깊이나 높이라는 하나의 차원이 있어야만 그것이 나선형으로 나아간다. 무한한 태엽감기가 아니라, 그것이 서로 다른 차별점을 두어 공간 안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 때에는, 어떤 고차원적인 분석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메타적인 관점이란 이런 것을 말한다. 결국은 현실에 의미가 없을지라도 특이점을 소멸시키고 싶다는 욕망이 문제를 무화시킨다.
사실 해결된다면 무엇이 남는다는 말인가. 인간이 과학으로 별들의 운행을 들춰내어 시심詩心이 사라진 것이아니다. 별들의 움직임을 명석하게 드러내어 그것이 외려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단지 멀리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보는 관조에서 나온다. 뻗어가는 별들은 목적이란게 없다. 우리의 시선도 목적이란 없다. 까마귀는 비행하며 도시를 위에서 부터 바라본다. 특이점을 지나려면 날아야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의 세계로. 혹은 그것이 존재하더라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세계로 말이다.
인간은 과연 진보하는가? 라는 거대한 물음에,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모눈종이의 덧댐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투명종이 위에 온갖그림을 덧댄다. 사물을 본뜨고 겹쳐서 그려낸다. 그것들이 현실이라는 사물위로 겹겹이 쌓여간다면 종국에는 검은 바탕의 종이만이 남게 될 것이다. 연필로 더럽혀진 종이. 엔트로피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온 세상이 공평하게 새까맣게 되어질 때 까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인간이 발전한다면 종국에는 파국으로 치닫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대를 경험한 자의 종이는 순수하다. 모든 것이 덧대어져 검게 변할지라도, 시대의 덧칠은 여백이란게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사유하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킬 것이라는 강렬한 욕망은 순수한 여백이 유혹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