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G만 꿈꾸던 디자이너의 깨달음

PLG와 SLG 사이, B2B SaaS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균형 잡기

by min

직전 글로 B2B SaaS Maker's Gathering 후기를 공유했습니다. 그날 인상 깊었던 세션 중 하나가 바로 ‘세일즈 주도 성장(SLG)’에 관한 내용이었는데요. 저 역시 PLG(Product-Led Growth)와 SLG(Sales-Led Growth) 사이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고민해 왔기에, 이번 기회에 관련 내용과 그동안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제품 주도 성장(Product-Led Growth, PLG) VS. 세일즈 주도 성장(Sales-Led Growth, SLG)


프로덕트 사이드에서 일하는 직군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제품 주도 성장에 대한 열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잘 알려진 Dropbox, Notion, Figma 같은 PLG 성공 사례가 워낙 상징적이다 보니, 더더욱 제품 주도형 성장이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품이 좋으면 자연스럽게 성장할 것이다'라는 신념이나 기대를 가지는 경우도 많고, 제품 중심 문화를 가진 조직에서 제품 중심으로 일하게 될 거라고 기대를 하죠. (저도...)


그런데, 현실은....

일을 하다 보면 제품 개발 팀과 비즈니스 사이드의 요구가 상충되는 순간을 종종 마주하게 됩니다. 특히 계약 단가가 높은 엔터프라이즈급 고객이 관심을 보이면, 그에 맞춰 제품의 방향이 바뀌거나 내가 하는 일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고객의 요구가 프로덕트 사이드의 의사결정에 강하게 작용하고, 업무 흐름까지 바꾸는 상황은 세일즈가 성장을 주도하는 흐름이 조직 안으로 들어온 것이죠.


이런 상황을 여러 번 마주하다 보니, '너무 세일즈 위주로 제품이 업데이트되는 것 아닐까?', '제품 로드맵이 흔들리는 건 아닐까?' 같은 고민을 자주 했던 것 같습니다. 제품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성장 방식에 더 끌렸던 저는, 'B2B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건가?'라는 체념 섞인 마음을 가진 적도 있습니다.




PLG vs. SLG

그렇다면 반드시 제품 주도 성장이 '옳은 길'일까요? 세일즈 주도 성장이 나쁜 걸까요?


제품 주도 성장

제품이 성장 동력

무료 체험, Freemium, 셀프 온보딩 등으로 고객 진입

개인 → 팀 → 조직 순으로 bottom up 고객 확보

직관적, 스스로 써볼 수 있는 제품이 이상적


세일즈 주도 성장

영업팀이 성장 동력

Out-bound, 데모 요청 등으로 고객 진입

Top-down. 의사결정권자 공략으로 고객 확보

복잡하고 고관여가 필요한 제품이 이상적


제품 주도 성장은 제품 자체가 성장의 동력이 되는 구조입니다. Dropbox, notion, figma처럼, 사용자가 무료로 혹은 쉽게 제품을 사용해 보고, 자연스럽게 팀이나 조직 단위로 확장이 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세일즈 팀의 개입 없이도 제품만으로 마케팅과 세일즈가 이루어지는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세일즈 주도 성장은 영업 조직이 성장의 중심축이 되는 방식입니다. PLG와 달리, 고객이 제품을 스스로 사용해 보고 확산시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복잡하고 고관여가 필요한 제품일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제품이 조직 전체, 혹은 조직 문화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의사결정권자를 공략하는 세일즈 전략이 핵심이 됩니다. 요구사항도 다양하고 의사결정 구조도 복잡하기 때문에, 계약까지 수개월이 걸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정리해 봤을 때, 결국 타겟 시장과 고객의 특성에 따라 전략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드마켓이나 SMB를 타겟으로 한다면 PLG 전략도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조직적 도입이 필요한 B2B SaaS 제품일 경우, 결국 세일즈 조직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죠.



'프로덕트 주도 성장으로 가야 해'라는 편견

앞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 제품 주도형 성장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실제로 주변의 많은 프로덕트 사이드 동료들도 비슷한 기대를 갖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대로, 세일즈 주도 성장에 대해서는 저처럼 심리적 장벽이나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생각이 존재할까요?

제가 가졌던 생각과, 일하면서 부딪히고 꺾이며 알게 된 현실을 정리해 봤습니다.


1. 좋은 제품이면 알아서 쓸 것이다?

IT 씬에서 PLG의 성공 사례는 굉장히 상징적입니다. 그래서 많은 프로덕트 사이드, 특히 디자이너들은 '내가 만든 제품, UX로 성과를 내고 싶다'라는 생각과 함께 '세일즈보다 제품'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어도 사람들이 알아야 쓸 수 있습니다. 시장 진입 시점에 있다면 더더욱, 노출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제품만으로는 사용자를 끌어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이때 세일즈와 마케팅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B2B 환경에서는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과 구매를 결정하는 사람(의사결정권자)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사용자는 제품을 좋아할 수 있지만, 의사결정권자는 완전히 다른 기준들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조직 구조, 보안, 정책, 예산, 사업 방향, 심지어 비즈니스 관계 같은 어른들의 사정(...)까지 고려됩니다. 제품 자체의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로 계약에 실패하고 사용자를 잃게 되는 경우도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을 최소화하고 고객사의 요구사항 하나하나 돌보며 대응해서 계약까지 끌고 가는 것이 세일즈의 역할이더라고요.


2. 제품에 대한 애착

제품 팀은 하나의 기능을 만들 때도 치열하게 고민합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요구하는 기능이 제품 철학과 반대될 경우 거부감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런 요구사항이 마구잡이로 들어오고 적절하게 조율이 안 된다면 실제로 제품 내에 '이건 뭐지?' 싶은 조잡한 부분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좋은 제품을 만들고 있다는 믿음이 약해지고 회의감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실제로 세일즈를 통해 들어오는 요구사항이 제품의 방향과 부딪힐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건..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일즈를 통해 듣는 고객의 목소리는 100% 검증된, 실제 고객의 니즈입니다. 이런 피드백을 전략적으로 선별하고, 제품 로드맵과 조율해서 반영한다면 오히려 고객 중심 문화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3. 디자이너의 소외감 (중요!)

디자이너에게 가장 큰 동기부여는 '내가 설계한 제품이 제대로 작동해서 고객에게 가치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일즈 주도 성장 문화에서는 제품 사용이 세일즈와의 관계로 시작됩니다. 제품을 통하지 않고 계약이 이뤄지면 디자이너는 '내가 만든 제품으로 설득한 것이 아니다'라는 소외감을 느낄 수 있어요. (정말요) 또한 고객은 이미 사전 조율된 목적과 기능만을 가지고 제품에 접근하기 때문에, UX의 중요성이 축소되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정말요 2)


하지만 디자이너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여전히 많습니다. 꼭 제품을 먼저 찾아서 사용하는 유저만이 '진정한 사용자'인 건 아니더라고요. 고객이 어떤 맥락으로 들어왔는지 이해하고, 그에 맞는 흐름을 설계하거나, 특정 고객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UX를 설계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연결된 고객과의 관계는 곧 고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핫라인이 가진 것과 같아서, 일종의 스폰서 유저를 얻은 것 같은 든든한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PLG와 SLG 사이에서 오랜 기간 고민하며 알게 된 것은, 제품이 좋으면 알아서 성장한다는 믿음이 이상적이긴 하지만, 모든 시장과 고객군에게 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제품 주도 성장에 대한 열망 때문에 세일즈 중심으로 돌아오는 요구사항에 대한 거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앞서 언급한 현실을 알게 되고, 편견도 점점 깨지게 되었어요.

이제는 프로덕트와 세일즈 중 하나가 극단적으로 중심이 되는 것보다는, 제품을 만들 때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PLG든 SLG든 어느 한쪽만이 정답은 아니며, 상황에 따라 균형 있게 접근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고, 제품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결국 디자이너로서 중요한 건, 어떤 성장 전략이든 고객 경험을 더 나은 방향으로 설계하려는 태도였거든요. PLG든 SLG든, 고객을 향해 있다는 점은 같으니까요.


...(아니 근데)그래도! 4번, 디자이너의 소외감은 여전히 프로덕트 디자이너에게 심각한 문제이자 단점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PLG와 SLG에 대해 고민하게 된 계기도 이런 문제를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SLG 환경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는 어떤 장단점을 경험하게 될까요?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어떤 태도로 UX를 챙기고, 제품과 나의 성장을 이끌 수 있을까요? SLG 환경에서 UX와 직업적 효능감을 지키며 균형을 잡으려 애썼던 제 경험을 다음 글에서 풀어보려고 합니다.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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