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둥이의 탄생]

1. 의사도 간호사도 Be The Reds!

by 머루

2002년 6월 22일. 그러니까 그날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태극전사들이 무려, 스페인을 꺾고 4강행 티켓을 거머쥔 날이다. 경기를 보기 위해 출산예정일을 이미 1주일이나 넘긴 나는 남편 그리고 산후조리를 위해 1주일 전부터 우리 집에 와 계시던 엄마랑 빨간 Be The Reds! 티셔츠를 입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때마침 토요일 오후였다.


언제 병원에 가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모두 치맥 대신 치콜로 만족해야 했지만 경기를 보는 순간만큼은 예정일을 훌쩍 넘긴 초조함도, 진통에 대한 불안도 잊을 수 있었다.

무슨 축구 경기 따위가 출산의 공포를 압도하냐고? 모르는 말씀. 2002 월드컵을 경험했던 세대라면 긴말 안 해도 이 말이 과장이 아니라던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대표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국민의 8할쯤은 같은 기쁨과 같은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은, 그런 ‘대화합’의 시절이었다.


승부는 쉽게 나지 않았다. 기적의 신화를 쓰며 8강까지 올라온 대표팀이었지만 상대는 유럽의 강호 스페인. 나는 평소 축구에 대해 큰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별로 없었지만 축구공처럼 둥근 배를 안고 신혼집 안방에 있는 조그마한 TV 화면으로 매 경기를 빠짐없이 지켜봐 온 터였다. 그런데 이날 경기는 유독 출산이라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는 나처럼 조마조마하기 짝이 없었다.


전후반, 그리고 연장전까지 120분을 선수들 모두 필사적으로 뛰었지만 양 팀 모두 득점이 없었다. 결국 승부차기. 숨 막히는 긴장 속에 한 골씩 주고받다가 골키퍼 이운재 선수가 드디어 한 골을 막아 냈다. 승리에 대한 예감으로 심장은 거칠게 뛰었다. 임산부가 이래도 되나?

주장 홍명보가 마지막 골을 찼고 결과는 5대 3. 대한민국은 예상을 뒤엎고 마침내 4강에 진출했다. 환호성인 듯, 절규인 듯, 아파트 단지가 울렸다.


“국민 여러분은 저 승부차기 심정을 모릅니다. 눈앞이 깜깜해요.

대학입시 보는 거 정말 10배, 100배 힘든 압박을 받으면서 선수들이 차는 겁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축구선수, 사윗감으로는 와따예요.”


당시 개국한 지 10여 년 된, ‘따끈따끈’했던 SBS의 중계방송은 지금 다시 들어도 절로 웃음이 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리로 몰려 나갔지만 우리는 잠을 자야 했다. 왠지 모르게 곧 아기를 만날 것 같은 느낌. 아니나 다를까. 그 밤, 초저녁부터 한숨 자다가 밤 10시가 넘어 잠에서 깼는데 허리에서 뚝, 소리가 나더니 양수가 조금 샜다.


병원에 도착해 몇 가지 검사를 마친 후 가족분만실(가족분만을 비롯해 수중분만, 그네분만 뭐 이런 것들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에 누웠는데 서서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통증이 밀려왔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악, 소리를 지르게 하는 그런 통증이 아니라 뭔가 무지근하면서도 집요한 느낌의 낯선 통증이었다.


진통이 점점 심해지면서 헛구역질까지 하고 있자니 담당 의사와 간호사들마저 굳이 가운 안에 Be The Reds!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이 꼴 보기 싫다.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인데도 촌스러운 빨간 티셔츠를 입고 뭐가 그리 좋은지 오늘따라 싱긋 웃으며 “호흡하세요”, 하는 의료진이……. 나는 얄밉다.

(내가 좀 전까지 저걸 입고 있었다고?)

게다가 밖에서는 트럭을 타고 거리를 내달리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사람들.

흑, 다들 즐거운데 나만 힘든가 봐…….


기진맥진해서 오기만 남아 있던 정오 무렵, 드디어 3.66㎏의 건강한 딸이 태어났다. 짐을 챙기러 집에 갔던 남편이 구독 중이던 조간신문을 가져왔다. 2002년 6월 23일 자. 딸이 태어난 그날의 신문 1면은 참으로 ‘장엄’했다.

딸이 태어난 날의 신문을 지금도 보관 중이다. 안정환, 박지성, 홍명보, 황선홍 그리고 히딩크와 박항서까지 화려했던 그 시절

어쨌거나 나의 딸은 몰랐을 거다. 자라는 동안 수없이 이 말을 듣게 될 줄.

“너, 월드컵둥이구나!”

2002년은 대통령 선거도 치러진 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대선 후보들의 경기 관람 소감을 전한 2002년 6월 23일 자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