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학교가 끝나면 가방보다 무거운 숙제가 있었다.
바로, ‘일기 쓰기’였다.
“오늘은 뭐 했니?” 보다
“일기 써왔니?” 가 더 무서웠던 날들.
왜? 매일 써야 하는지,
왜? 선생님께 보여드려야 하는지 그땐 알 수 없었다.
그저 일기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라 머리가 복잡해지곤 했다.
그 시절의 일기는 늘 비슷했다.
‘날씨 맑음.’ ‘오늘은 비가 와서 우산을 썼다.’
‘친구들과 집에 오는 길에 학원 땡땡이를 치고 떡볶이를 먹었다.’
‘아빠가 통닭을 사 오셔서 맛있게 먹었다.’
하루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냥 간단하게 쓰곤 했다.
그때는 몰랐다.
선생님이 왜 그토록 “일기를 써보라”라고 하셨는지.
하루를 적어보는 그 단순한 과제가
사실은 ‘하루를 되돌아보며 나를 이해하는 연습’이고,
‘내 감정을 읽는 습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시절의 나는 마음과, 감정에 대해 몰랐기에
그저 귀찮은 숙제라고만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어릴 적처럼
‘오늘 비가 왔다’, ‘친구와 놀았다’ 식의 일기를 쓰진 않는다.
비가 내린 하늘이 왜 유난히 어두워 보였는지,
아침에 떠오른 첫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오늘 만난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조용히 써 내려간다.
문장은 여전히 간단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한 줄만 써도 나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길 때가 있다.
나는 일기를 쓸 때
‘감정을 알아차려 밖으로 꺼내는 것에 ’ 큰 의미를 둔다.
마음속에 고여 있던 감정을 한 문장으로 떠내려 보내듯,
집중해서 써 내려가다 보면
마음이 정리되고, 마음이 가벼워진다.
누군가와 수다를 떨 듯,
혹은 나를 상담하듯,
한 줄 쓰고 나면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가 된다.
어릴 때의 일기가 ‘기억하기 위해’ 썼던 기록이라면,
지금의 일기는 ‘흘려보내기 위해’ 쓰는 기록이다.
가끔은 ‘붙잡기 위해’ 쓰기도 한다.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
그리운 말투, 웃음소리, 따뜻했던 손길 같은 것들.
일기는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감정의 조각들이
모양을 갖추고 흘러가는 통로가 되어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아니라,
그 일을 겪으며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선생님의 말씀이 문득 떠오른다.
“하루에 한 줄이라도 써보렴. 네 하루가 조금씩 달라질 거야.”
그때는 선생님 말씀의 뜻을 몰랐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일기를 다시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건 이미 마음속에서 ‘나를 만나고 싶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마음을 그대로 적어보자.
조용히, 천천히 나와 대화하듯이.
바쁜 하루를 마무리하며 잠깐 멈춰 서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생긴다면,
세상이 조금 덜 복잡해 보일지도 모른다.
내 마음의 소란스러운 파도 위에,
일기가 작은 부표처럼 떠 있을 테니까.
그저 한 줄,
“오늘 괜찮았다.”
혹은 “오늘은 조금 힘들었다.”
그렇게 시작해 보자.
한 줄씩 써 내려가며,
내 마음을 조금씩 다독여보자.
이제 일기 쓰기는 더 이상 어려운 숙제가 아니다.
이제는 나에게 보내는 가장 다정한 인사이자,
마음을 돌보는 조용하고 따뜻한 위로가 되고 있다.
오늘의 마음을 한 줄로 적어보자.
그 한 줄이 내 마음을 조금씩 다독여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