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부모님 댁에 가는 날이면
조금은 긴장하고 출발을 한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향해야 할 집인데, 마음이 늘 무겁다.
오늘은 괜히 말이 오가다 불편한 공기가 흐르진 않을까,
또 누군가의 날카로운 말에 마음이 다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부모님 댁으로 향하는 길이
즐거움보다 조심스러움으로 가득하다.
어쩌면 이런 분위기는 꽤 오래전부터였는 지도 모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익숙한 집 냄새가 먼저 코끝을 스친다.
오래 사용한 가구에서 배어 나오는 나무 냄새,
주방에 은은히 남아 있는 음식 냄새가 뒤섞여 있다.
예전 같으면 엄마 밥 냄새가 포근하게 느껴졌을 향기인데,
지금은 어쩐지 마음이 조금 무거워진다.
거실에 들어서면 티브이와 소파만이 우두커니 공간을 채우고 있다.
아빠는 아빠방에서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없이 앉아 계시고,
엄마는 안방에서 TV를 보시다가 깜빡 주무시듯 잠이 들어계신다.
그러다 내가 들어가면서 큰소리로 “엄마~” 하고 부르면
엄마가 방에서 나오시고 아버지는 이어폰을 빼고,
"왔니"라는 짧은 대화 몇 마디가 오간다.
대화가 오가더라도 가볍게 묻고 짧게 대답하는 말들이 전부다.
언제부터인지, 웃음소리 대신 어색한 정적이 자주 흘러,
집안 공기는 언제든 작은 말 한마디에도 쉽게 갈라질 것처럼 건조하다.
분명 예전에도 같은 소파, 같은 테이블, 같은 풍경이었는데,
그 안에 흐르는 공기만은 달라졌다.
따뜻해야 할 집인데,
마음속에서 식어가는 밥상처럼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거리가 나와 가족 사이의 간격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벽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아빠께서 팬더믹 이후로 말수가 줄어들면서 서먹해졌다.
엄마와는 사소한 대화에서조차 쉽게 다툼으로 번지곤 한다.
오빠와는 가벼운 안부만 오갈 뿐,
어릴 적 장난스레 웃던 모습은 더 이상 찾기 힘들다.
가족은 그대로인데,
그 속의 관계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이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
먼저 가족들과의 외식 자리도 만들어보고,
유머라고 웃긴 얘기도 먼저 해 보기도 하고,
불편한 마음을 숨기며 다가가 보기도 했다.
하지만 각자의 성격과 생각은 쉽게 변하지 않았고,
마음속의 간극은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다.
지금은 그저 다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서로를 조심스레 피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괜찮은 선택일까?
부모님께서 점점 더 연로해지고 계시니
나는 마음 한쪽에서 조급한 마음도 생기고,
다른 한쪽의 마음에선
'부모님이 편하신 대로 해 드리자'라는 마음이 있다.
가끔은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건 아닐까.
부모님과 나는 다른 세대를 살아왔고,
오빠와 나 역시 이미 각자의 삶에 익숙해져 있다.
서로 다른 길 위에 서 있는데,
여전히 예전처럼 가깝기를 기대하는 게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를 쉽게 내려놓을 수도 없다.
가까우면서도 멀고,
편안하면서도 불편한 이 모순된 감정 속에서
나는 늘 갈피를 잡지 못한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건,
다투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지내는 내 마음이 괜찮은 것일까?
가족에게서 느끼는 불편함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겪게 되는 과정일까?
그래서 지금 물러선 한 발짝은
도망이 아니라 체온을 지키는 간격이다.
이 온기가 돌아올 때, 나는 다시 필요한 만큼 다가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