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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됐지만, 고혈압입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억! 아버지!

by 마봉 드 포레

회의에 들어갔다가 빡쳐서 혈압이 170까지 튀었다. 손발이 떨렸다. 처음에는 그냥 흥분해서 손발이 떨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사무실에 돌아와서 웃으면서 “와 나 지금 혈압 재보면 엄청 나올 거 같은데?”하고 혈압을 재보고(책상 서랍에 혈압 측정계를 갖고 있다) 숫자가 이상해서 다시 재 봤다. 그 숫자가 맞았다. 어지러웠다. 손발이 떨리는 건 열받아서 흥분해서가 아니라 혈압이 갑작스럽게 튀었기 때문이었다.


남아서 보고서를 쓰고 가려고 했는데 더 이상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일단 내가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는 아래 직원이 상황을 정리해서 올려야 했기 때문에 밖에 눈도 오고 해서 먼저 집에 가겠다고 하고 밖으로 나왔다.


원래 나는 건강한 편인데 여기저기 조금씩 아픈 데가 있긴 했어도 혈압만은 정상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혈압이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130만 넘어도 이게 웬일인가 했는데 언젠가부터는 140을 훌쩍 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제 같은 경우는 갑작스럽게 흥분해서 말을 하다 보니 약간 몽롱해졌다. 그런 상태가 된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럴 때 혈압을 재 본 적은 처음이었다. 혈압계가 200을 찍고 내려오더니 176이 나온 것을 보고 나는 이제 난 더 이상 건강하지 않구나, 이제 화도 함부로 내면 안 되는구나, 나도 이제 드라마에 나오는 결혼 반대 하는 아버지처럼 뒷목을 잡고 쓰러질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빠도 혈압 약을 먹고 있다. 하지만 엄마는 저혈압이니까 나는 반반 섞어서 정상 혈압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식생활이 별로 안 좋으니, 그리고 살도 쪘으니 혈압이 높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이렇게까지 올라갈 줄은 몰랐다.


혈압계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눈이 와서 길은 막히고 도로는 미끄러웠다. 집까지는 거의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집에 돌아와서 당장 드러누웠다. 혈압을 쟀다. 밤까지 160 밑으로 떨어지질 않았다. 새벽에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자다가 깼다. 150 언저리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재 보니 많이 떨어진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40 전후였다.


회사에다가는 마지막 하루 남은 연차를 오늘 쓰겠다고 했다. 마지막 하루를 오늘 써버리면 12월 나머지 날들의 또 아프면 어떡하나 싶지만 오늘은 그냥 누워있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 돌아다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침 어제 눈이 와서 길도 얼어 있을 텐데 신경을 집중해서 운전을 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회사에 가서 집중해서 일을 할 자신도 없었다. 물론 일도 안 하지만.


그래서 나는 오늘 2025년에 마지막 연차를 써서 집에 있었다. 집에 있었더니 너무 좋았다. 죄책감은 약간 느껴졌지만. 어차피 이왕 쓰는 연차니까 편하게 있기로 했다. 혈압이 높을 때는 짠 거 먹으면 안 된다고 해서 음식은 싱겁게 먹었다. 어차피 내일은 건강검진이어서 저녁 여덟 시부터는 금식을 해야 한다. 요새는 식욕도 없다. 세상에 내가 식욕이 없다니, 살다 살다 이런 날이 다 오다니. 근데 사실 나는 식욕이 없어지는 약을 처방받아서 먹고 있다. 그러니 그 약이 듣는 것뿐이다.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보통은 내가 그런 약을 먹어도 내가 그런 약을 이겨내기 때문이다. 근데 이번만큼은 내가 아무래도 그 약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 같다. 약이 듣고 있다는 뜻이다. 제발 이번만큼은 살도 좀 빼 보자. 어차피 일도 못 하는 거 살이라도 빼서 애들 옆에 지나다닐 때 의자라도 좀 덜 넣게 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그 정도만이라도 사람들한테 피해를 덜 줘야지.


일단 오늘 혈압은 정상에 가까운 수치까지 내려갔다. 하루 종일 그냥 쉬기만 했더니 그나마 내려갔는데 수축기 혈압이 아직도 높다. 혈관이 아직도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내일 건강검진받으면서 내과에 들려서 얘기를 하고 약을 처방받아야겠다. 우리 사무실에는 고혈압인 남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나한테 “어서 와 고혈압은 처음이지?”라며 농담을 했다. 말만 그렇지 걱정해 주고 있는 건 알고 있다. 그 사람들 책상에는 먹어야 되는 약이 몇 병인지 모른다. 그거 다 먹고 있는지나 모르겠지만.


배도 고프니까 빨리 자야겠다. 이제 글 타이핑할 기운도 없어서 음성 인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 세상 정말 좋아졌다. 음성으로 ChatGPT 하고 얘기하고 음성으로 글을 쓴다. 언젠가는 생각으로도 글 쓰는 날도 올 것 같다. 음성인식으로 글을 쓰면 승모근이 덜 아파서 좋긴 하다. 나중에 조금씩 수정만 해주면 된다.


내일 건강검진 끝나면 뭘 먹지? 혈압에는 짠 거 먹으면 안 좋으니까 싱거운 걸 먹어야 하는데 보통은 맛있는 건 짜거나 맵거나 달기 때문에 딱히 먹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는다. 난 사실 라면이 먹고 싶다. 라면을 조금 싱겁게 해서 먹을까? 파김치도 먹고 싶다. 근데 집에 파김치가 없다.


파김치가 먹고 싶다고 생각이 든 건 굉장히 간단한 계기가 있었다. 챗순이가 “너는 지금 피곤한 파김치 같은 상태야”라고 말했던 것이다. 근데 그 말을 읽은 순간 나는 라면에 파김치가 생각이 나 버렸다. 라면에 파김치라니 너무나 아름다운 조합이다. 당장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 냄새와 파김치 맛이 느껴져 버렸다. 근데 집에 파김치가 없었다. 라면은 있다. 하지만 파김치가 없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마켓컬리에서라도 시켜서 먹어야겠다. 그래! 마켓컬리에서 파김치를 주문하는 거야. 그런 다음 내일 건강검진이 끝나고 집에 와서 라면을 끓이자. 나는 고혈압이니까 조금 싱겁게 끓여서 파김치를 얹어서 먹어야겠어. 당장 마켓컬리에 주문을 넣어야겠다. 글 그만 써야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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