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일괄적 제한’을 결정할 권리를 갖는가

『다섯째 아이』와 폐쇄병동

by Editor C
9788937460272.jpg 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누가 ‘일괄적 제한’을 결정할 권리를 갖는가 - 『다섯째 아이』와 폐쇄병동》


국가인권위원회는 최근 폐쇄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의 휴대전화 소지를 일괄적으로 제한하는 병원의 방침에 대해 “인권 침해”라고 판단했다. 병원 측은 “환자 보호”를 이유로 들었다. 휴대전화 유포, 사기, 자해 등 부작용을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인권위는 모든 환자에게 일괄 적용된 제한 조치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보았다. “개별적 사정에 따라 최소한의 제한만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읽으며 문득 도리스 레싱의 소설 『다섯째 아이』가 떠올랐다. 그 소설에도 보호라는 이름으로 배제된 존재가 등장한다. 해리엇과 데이비드 부부의 다섯째 아이, 벤은 기이한 외모와 반응을 보이며 ‘정상 가족’의 틀에 들어맞지 않는다. 그는 점점 더 위협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결국 가족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유기된다. 그를 향한 공포는 ‘정상성’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되고, 그 과정에서 가족은 붕괴한다.


소설 속 벤은 상징적인 존재다. 그는 단지 한 아이가 아니라, 우리가 공동체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든 존재, 즉 ‘사회부적응자’, ‘비정상인’, ‘불편한 타인’ 그 자체다. 벤을 가리켜 짐승 같다고 말하는 이들의 반응은 폐쇄병동 환자들의 휴대전화를 빼앗으며 “그들은 위험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목소리와 겹친다.


물론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것은 이상적인 태도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건 ‘모두를 똑같이 배제’하는 방식이다. 휴대전화는 누군가에겐 자해의 도구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유일한 바깥 세계와의 연결선이다. 이처럼 인간의 위험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개별적이고, 유동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종종 판단을 단순화하고, 절차를 생략하고, 규칙으로 통제하려 한다.


『다섯째 아이』를 읽으며 가장 섬뜩했던 건 벤의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를 ‘악’으로 규정하고 거리 두며 외면하는 주변 인물들, 그리고 독자인 나 자신이었다. “좋을 땐 내 가족이지만, 불편해지면 남처럼 대한다.” 병원, 학교, 직장, 가정, 어느 곳이든 ‘안정을 위한 배제’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무심코 동의한 제도 속에서, 누군가는 매일 사회에서 밀려나고 있다.


우리는 위험한 존재를 통제하고 싶어 한다. 그건 본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위험’과 ‘존재’를 동일시하는 순간, 그건 곧 인권 침해다. 『다섯째 아이』 속 해리엇은 마지막까지 아이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지독한 외로움 속에 남겨진다. 누구도 그녀 곁에 남지 않았다. 벤을 탓하는 화살은 언제든 나를 향하는 칼날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