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 속 인어 공주

모쏠들을 위한 연애 지침

by 한유진

누구나 아는 이야기입니다. 디즈니 영화의 해피엔딩이 원작을 각색한 것이라는 사실도, 원본이 비극으로 끝난다는 사실도 이미 익숙합니다.

원작에서 인어공주는 왕자를 죽인 후 인어로 되돌아갈 수 있는 칼을 버리고, 결국 바다의 거품이 되어 사라집니다. 지금 풀어볼 이 이야기는 어쩌면 ‘처음 사랑을 시작하는 모쏠’ 혹은 '첫사랑의 성장 서사'쯤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인어 스케치 (Sketch for A Mermaid)》, 1892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인어공주는 바다 왕국의 막내 공주입니다. 원문을 살펴보면 바다세계는 절대왕권이 작동하는 봉건 사회이며, 그 안의 규범은 계급 질서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홀 아버지 아래에서 양육의 중심에는 체면과 위계를 중시하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원문에서 인어공주의 할머니는 지혜롭고 침착한 여성으로 묘사되지만, 대외 활동보다 가정 내부의 역할에 집중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품위와 절제를 미덕으로 여기며, 특히 굴껍질 장식의 수량을 신분의 상징으로 삼습니다. 인어공주의 할머니는 자신이 꼬리에 달고 다니는 열두 개의 굴껍질을 자랑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신분의 상징이자 권위의 지표입니다. 일반 귀족 인어는 여섯 개의 껍질만 허락되고, 공주는 여덟 개까지 달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왕족의 고귀함을 상징합니다. 굴이 꼬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움직임을 불편하게 해도, 할머니는 아름다움은 인내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감정 억제와 고통의 수용을 미덕으로 학습한 세대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인어공주는 자라납니다.
여섯 자매는 각각 정원을 상속받고, 꽃과 조개껍질로 꾸미며 살아가지만 노동은 없습니다. 15세 성년식을 맞기 전까지 그들은 바다 위로 나갈 수 없고, 외부 세계의 인간을 직접 경험할 기회도 없습니다. 그들의 인생에는 상실도 좌절도 없습니다. 고통이 없으니 욕망의 성취와 경계, 감정의 복잡성도 알지 못합니다. 인어공주는 안전하지만 경험적으로는 미성숙한 환경에서 자란 셈입니다.


양육자인 할머니는 전통적 가치에 순응한 인물로 바다의 안락함을 여자의 행복으로 가르칩니다. 이와 같은 양육 구조는 현대 사회에서 과잉보호적 가정이 만들어내는 성장 환경과 유사합니다. 과보호적 환경에서는 판단과 선택의 경험이 제한되어 감정적·사회적 관계를 직접 경험하기보다 드라마, SNS, 웹소설 등를 통해 사랑과 인간관계를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코로나 이후 세대에서 두드러집니다. 관계 경험이 부족한 청년들이 서사를 통해 감정을 학습하고, 현실 관계에서는 표현보다 조심스러운 순응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입니다.


인어공주에게 사랑은 현실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배운 감정의 시뮬레이션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들려준 옛날 이야기, 언니들이 묘사한 지상 세계, 그리고 아름다운 왕자에 대한 환상 속에서 사랑을 경험이 아니라 상상으로 대체하게 됩니다.


순진한 인어공주는 한 순간에 왕자의 외모만 보고 순식간에 깊은 사랑에 빠져 버립니다. 몇분, 몇초 갑판 위를 바라본 그 짧은 순간이 전부였습니다. 왕자의 깨끗한 피부, 검은 눈, 웃는 표정이 모든 감각을 자극했습니다. 미디어 속 차은우가 지금 내 앞에 나타난 거지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절대 알 수 없죠. 책임감은 있는지, 성실하지, 도덕적인지, 어떤 취미가 있고 여가시간은 어떻게 보내는지, MBTI가 뭔지 말입니다. 그저 강한 성적 매력만이 인어공주의 모든 세포를 강렬하게 깨웁니다.


그녀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폭풍 속에서 그를 구해내기 위해 생명을 걸고 수면 위로 올라갑니다. 원문에서 인어공주는 조용하고 사려 깊은 성격으로 묘사되지만, 이 장면에서는 그간의 억눌린 감정이 폭발하듯 충동적이고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이는 과보호적 환경에서 자란 인물들이 경험하는 자율적 선택의 위험성과 유사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처음으로 그녀의 주체적 행동을 이끌어냈지만, 그 방향은 상당히 위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자를 잊지 못한 인어공주는 할머니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사랑’의 의미와 ‘행복해지는 방법’을 묻습니다. 할머니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인어에게는 영혼이 없단다. 인간 남자의 진실한 맹세와 결혼 서약만이 영혼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길이야.”


할머니의 관점은 지극히 전통적입니다. 남자의 맹세로만 영혼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여성의 완전한 존재를 남성의 선택과 승인에 의존시키는 구조입니다. 인어공주는 이 말에서 깊은 좌절을 느낍니다. 또한 이 장면은 할머니는 ‘사랑’이 아닌 ‘형식’을 강조합니다. 즉, 사랑의 진정성보다 사회적 승인(결혼)을 통해서만 존재의 완전성이 부여된다고 가르칩니다. 이 대사는 단순히 종교적 세계관이 아니라 가부장적 혼인 제도 여성의 존재 조건을 드러냅니다.


어머니의 부재로 부모님의 진실한 관계와 표현을 보지 못했고, 자매들 틈에 자라나 남자가 뭔지 사랑이 뭔지 글로 배운것이 전부인 머릿속을 파고들며 깊은 고민을 했을 같습니다. 결국 그녀는 사랑을 이해하는 대신, 할머니의 논리를 바탕으로 '사랑 = 인간 남자의 선택'이라는 해석을 합니다.


인어공주가 마녀에게 목소리를 내어주는 장면에서 그녀가 학습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왕자의 사랑을 얻기위해 마녀의 제안을 신중히 저울질 합니다.


'누구나 보면 반할 아름다운 외모, 춤추듯 유연한 자태.

목소리가 정도는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에게 내 주장을 하면 사랑이 깨질지도 몰라.

상대방에게 맞추어야 해.'


혀가 잘린 인어공주는 주저없이 약물을 받아들고 바다위로 올라갑니다. 그녀는 사랑을 능동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침묵과 헌신을 유일한 언어로 착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어공주의 사랑이 슬프고도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이는 관계에 미숙한 사람들에게 자주 보이는 심리 패턴입니다. ‘좋은 사람’, ‘착한 연인’, ‘순수한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수동성이 미화되고, 자기표현이 억눌리는 구조 말입니다. 인어공주는 그가 자신을 알아줄 거라 믿었고, 자신이 희생하면 그도 언젠가 마음을 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희생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이쯤에서 살펴봅시다.

왕자는 어떤 남자였을까요?


그는 인어공주의 마음을 한순간에 빼앗을 만큼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 입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이기도 하죠. 아름다운 인어공주를 본 왕자는 큰 호감을 느끼고 그녀를 궁전으로 데리고 옵니다. 호의를 배풀어 곁에는 두지만 진정 소중한 여인으로 대우하진 않습니다. 원문에서 왕자가 자신의 이상형을 언급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래, 너는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야, 너는 그들 모두 중에서도 가장 좋은 마음을 가졌으니까. 너는 내게 가장 소중하고, 너는 내가 한 번 보았고 분명 다시는 만나지 못할 어떤 젊은 처녀와도 같아. 나는 난파된 배에 있었고, 파도는 나를 성스러운 신전 가까이의 뭍으로 떠밀었지. 거기에는 여러 젊은 처녀들이 시중 들고 있었고, 그중 가장 어린 아이가 나를 둔덕에서 발견하고 내 생명을 구했어. 나는 그녀를 단지 두 번만 보았어. 그녀는 세상 모든 이들 중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지만, 너는 그녀와 닮았어, 너는 거의 그녀의 모습으로 내 영혼에 인장을 찍는 것 같아. 그녀는 그 성스러운 신전에 속해 있으니, 그러므로 나의 행운이 너를 내게 보냈고, 우리는 결코 헤어지지 않을 거야.”


여기에서 재미있는 건 왕자가 자신을 구했다고 생각한 여인을 두 번 봤다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분명 왕자가 이후 그 가장 어린 성전의 소녀를 만나고싶어서 그녀를 다시 찾아 갔다고 추측해 봅니다. 하지만 성전의 여자를 가질수는 없었죠.


나의 생명을 구한 어린 여자,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만 소유하지 못한 이상.


저는 왕자가 아직은 미성숙한 소년이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여자, 예쁜여자, 어린여자를 보며 자신의 영혼을 가져갔다고 말하는, 사랑을 배운 적이 없고 감정을 책임지는 법도 모르는 어린 혹은 나쁜 남자 말입니다.


그는 인어공주를 귀하게 대했지만 결코 자신의 세계 안으로 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인어공주를 성으로 데려와 비단옷을 입히고, 넌 언제나 내 곁에 있어야 한다 말하며 자신의 방 앞 방석 위에서 자게 했습니다. 그건 사랑이라기 보다는 물건을 가지는 소유욕혹은 통제욕구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에게 인어공주는 아마 말을 잘 듣는 귀여운 존재였을 겁니다. 그녀가 춤을 추면 칭찬했지만, 그녀의 발이 칼날처럼 찢기며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만큼 관심이 없었습니다. 꽤 긴 시간동안 인어공주의 입술을 탐하고 가슴에 기대어 쉬면서도 그녀의 슬픔은 무시했고 그녀의 침묵은 편안해 했습니다.

그럼에도 인어공주는 왕자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도 이렇게 합리화 합니다.


“내가 조금 더 잘하면, 그가 언젠가 나를 사랑해줄 거야.”
“그가 내 곁에 두는 이유는 나를 믿어서야.”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내 진심을 알게 될 거야.”


현대 사회의 많은 여성들도 이와 비슷한 함정에 빠집니다. 상대의 무심함과 냉담함을 느끼면서도, 그 사람이 떠날까 봐, 사랑이 끝날까 봐 스스로를 설득하고 감정을 억누룹니다. 타인의 곧 자기 존재의 의미가 되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할까 봐”보다 “사랑을 잃을까 봐”가 더 두려운 것입니다.


사실 인어공주는 사랑을 몰라서 불행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사랑을견디는 배웠기 때문에 불행해진 것입니다. 사랑이 자신을 지켜주는 게 아니라, 자신을 잃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죠. 그녀는 고통을 숨기고 미소를 지으며 춤을 추고, 그의 곁에서 조용히 무너져 갑니다.


왕자가 어떤 남자인지 자신의 배우자가 될 이웃나라의 공주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더 잘 드러납니다.


“바로 당신이군요!” 왕자가 말했습니다. “내가 해변에 시체처럼 누워 있었을 때, 나를 구한 이가 바로 당신이군요!” 그리고 그는 얼굴을 붉힌 신부를 팔에 안았습니다. “오, 나는 더없이 행복합니다!”


왕자는 한 사람을 빠르게 이상화하고, 또 빠르게 잊습니다. 성전의 소녀에게서 본 ‘순수한 여신상’을 사랑이라 믿었고, 인어공주를 그 그림자의 대체물로 삼았으며, 결국 새로운 공주를 보자 그녀에게서도 그 “이상”을 발견했다고 착각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그에게 여자는 이상과 욕망을 투사하는 거울일 뿐입니다.


원작에서 인어공주는 왕자의 결혼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죽음을 의미함을 명확히 인지합니다. 복수의 기회가 찾아오지만 칼을 바다에 버리죠. 그리고는 새 신부와 함께 잠든 왕자의 이마에 조용히 입을 맞춥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사랑의 포기’가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 온 환상 즉, 타인을 통해 완성되려는 사랑의 구조를 스스로 해체한 것입니다.


왕자에게 입을 맞춘 부위가 ‘이마’였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마에의 입맞춤은 고대·중세 유럽에서 축복과 작별의 이중 의례로 쓰였습니다. 인어공주는 왕자에 대한 복수를 포기한건 아닌것 같습니다. 대신 그녀는 왕자와의 완전한 이별로 소중한 자신을 돌보는 첫걸음을 진정한 복수로 시작합니다.


이후 원문에서 인어공주는 ‘공기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공기의 세계는 할머니가 말해준 여인의 행복과 전혀다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인어의 수명만큼 선행을 베풀면 스스로 영혼이 생겨나 영원한 행복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공기의 딸들은 선행은 착하고 좋은 사람을 만날 것, 행복한것을 볼것, 미소지을 것, 악한것을 보고 슬퍼하지말 것 이라고 구체적으로 전합니다.


이 단계의 인어공주는 더 이상 사랑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시선과 태도로 세상을 바꾸고 자신을 정화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녀가 공기의 존재로 살아가는 300년은 자기 치유와 자기 성장의 시간으로 읽힙니다. 공기방울이 되어 날아가며 인어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대상, 열망의 자리, 자신의 과거 이상이었던 새 신부의 이마에 마지막으로 키스로 이별을 전합니다.


결국 인어공주는 더 이상 타인의 사랑을 구하는 수동적인 위치가 아니라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확장하는 주체로써 해방됩니다.


행복은 밖이 아니라 내 속에서 자라납니다.


막 사랑을 시작하고, 미숙한 그 열기에 아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진정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나는 나를 사랑하는가?

나는 사랑을 아는 사람을 사람을 사랑하는가?


라는 뻔한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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