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대로 보다 01. 넷플릭스 <애나 만들기>
10대 시절 나는 학교에 다녔다. 나 외에도 수많은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 우리는 반장 선거, 전교 회장 선거를 경험했고, 친구들과 싸우지 않고 잘 지내는 법, 싸웠을 때 화해하는 법, 규칙을 어기면 체벌을 받는다는 사실 등을 배우고 경험했다. 하지만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나는 알았고, 내 짝꿍도 알았을 거다.
20대가 되고 성인이란 타이틀이 생겼다고 해서 우리가 좀 더 세련된 사람이 된 건 아니었다. 10대 때는 노래방과 피시방, 떡볶이로 끝났던 유희의 범위가 더 넓어진 것뿐,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친구와 안 싸우고, 싸워도 화해하고 다시 잘 지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다들 이러고 살잖아' 격의 자기 위안을 배웠고, 세상은 넓고 친구는 다시 사귀면 되니 손절하는 법을 배웠고, 여러 틈들을 알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법을 배웠다. 30대가 되어도 여전히 그렇다. 아마 40대, 50대가 돼도 그럴 것 같다. 모두가 이렇게 엉망진창이다. 정신적으로 문제 있고, 사람이 정말 못나서가 아니다. 사람이기이에 부족한 것투성이고 그걸 애써 감추며 살아갈 뿐이다.
이런 엉망진창들이 그래도 같이 잘 살아보자고 만든 게 사회 시스템이다. 그래서 그 시스템이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얻은 시스템의 불공정 이익을 잊고, 다른 누군가가 얻은 불공정 이익에 분노하며 삶을 살아간다. 또한 그 시스템에 구멍이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윤리, 사람됨의 기본과 정도를 운운하며 메꿔지지 않는 구멍을 채워보려 노력한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꾼 애나 소로킨은 사회 시스템의 불공정과 구멍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편견, 욕망, 허영심을 잘 꿰뚫고 있었다. TPO(Time, Place, Occasion)를 중요시 여기고, 문화 예술에 대한 안목을 높이 평가하고, 적당한 표정과 제스처를 자리에 알맞게 취하는 듯한 미국 최상위 계층 사회의 허점을 잘 이용했다. 애나 소로킨은 자기광고를 매우 잘했다.
완벽한 TPO를 갖춘 외국에서 온 상속녀로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고 상속 대신
문화예술 사업을 선택한 젊은 여성
누가 봐도 완벽했다.
'애나 만들기' 회차가 거듭할수록 애나 델비가 짜증남과 동시에 해당 사건을 솔직하게 오픈하려고 하지 않는 최상위 계층 사람들의 모습이 황당했다. 사기를 당했다고 하면서 그들은 사회적 체면 때문에 솔직할 수 없었다. 애나 델비는 스스로가 뱉은 거짓말에 점점 압도되고 있었고, 허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보지 못했다. 사실 그녀의 모습은 병적이었고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 주변 사람들이 너무 착한 나머지 그녀에게 속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 역시 그녀로부터 철저하게 얻고자 하는 게 있었고, 그래서 그녀 주위를 맴돈 것이다.
레이첼은 SNS 인플루언서이자 상속녀인 그녀와 친구가 되어 일부를 누리고 싶었고, 네프는 흑인 여자이자 호텔 직원으로 살던 자기에게 100달러 지폐를 마구 뿌리며 친구라 해준 그녀가 좋았고, 케이시는 귀찮았지만 돈 주는 고객이라 어쩔 수 없었고, 헤지펀드/스타트업 대표 등등은 애나가 말한 그녀의 배경과 외모를 사랑해서 넘어갔고, 월가는 큰 건을 잡았다 생각했고 굴러들어 온 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비비안은 명예회복을 위해 핫한 기사거리가 필요했고, 토드는 집안 빵빵한 와이프 식구들로부터 기죽지 않기 위해 애나를 변론해야 했다.
모두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했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얻고 싶은 것만 얻으려 했다.
사람들은 누군가 잘못을 하면 그 사람의 부모까지 논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과하게 까불거리는 남자애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두고 어른들은 하나같이 "쟤도 딱해, 부모가 다 일을 해서 애를 볼 사람이 없으니 저렇게 예의가 없지 쯧쯧" 정말 걱정이 된다는 투로 흉을 보았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었고, 나 역시 누군가가 범죄를 저질러 뉴스에 나오면 '부모가 애를 어떻게 키운 거지?'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처럼 누군가가 사회규범과 정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부모까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래야만 된다는 생각으로 '아빠가 알코올 중독자겠지,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이었겠지, 엄마가 애를 버리고 떠났겠지, 엄마가 자기 치장만 하고 애를 내팽개쳤겠지, 엄마가 사업하느라 애를 못 돌봤을 거야'라고 판단한다.
선과 악의 경계는 불분명하고, 악은 때로는 선의 얼굴을 지니기도 한다. 그래서 죄가 발현되기까지 우리가 이해할 만한 연결고리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레퍼토리를 원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상대의 행동이 이해가 가고 세상은 나쁘지 않으며 사람들은 대체로 착하다는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결고리가 전혀 없는 죄가 등장하면 세간의 주목을 더 받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애나가 도저히 이해가지 않은 비비안은 무작정 애나의 부모를 만나러 독일에 갔다. 비비안의 과한 행동도 놀라웠지만 애나 엄마의 말은 나를 더 놀라게 만들었다.
하지만 또 다른 아이들은 같은 집에 사는 남 같기도 해요.
애나는 평생 낯선 타인이었어요. 차갑고 낯선 타인.
드라마에 어린 시절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애나가 패션 잡지의 모델들을 오려서 모아두는 모습이 나온다. 그럼 애나 소로킨이 애나 델비가 돼서 허상을 쫒고 사기를 친 일에 대해 우리는 패션 잡지 탓을 하면 될까? 누구라도 성공할 수 있을 것처럼 아메리칸드림을 과대광고한 미국을 탓해야 될까? 예술문화 재단 사업을 하겠다고 꿈을 꾸게 만든 애나의 전 남자 친구 체이스를 탓하면 될까? 의심의 여지없이 애나를 전적으로 신뢰해서 그 망상을 멈추지 못하게 만든 사람들을 탓하면 될까? 애나가 쓰는 돈에 눈이 멀어 그녀를 열렬히 옹호한 친구들을 탓하면 될까?
사람들은 어떤 사건에 대해 꼭 누군가를 탓해야, 하다못해 사회제도라도 탓해야 마음이 편해진다. 나라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끝없는 탓을 해야 한다. 이 고리를 끊어야 새로운 애나가 탄생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애나의 범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누구나 애나 델비의 모습을 조금씩 가지고 있다. 끊임없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길 원하고, 관심과 주목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선의라는 명목 하에 약간의 거짓말로 스스로를 예쁘게 포장하기도 한다.
자기 PR이라는 명목 하에 면접에서 약간의 과장을 섞어 입사했지만 입사동기가 사내 추천 제도로 입사했다는 말에 낙하산 아니냐며 의혹을 품고 사내 게시판에 익명으로 글을 쓴다. 포토샵이 섞인 어플로 셀카를 찍으면서 인플루언서 사진에는 얼굴에 주사를 맞았네, 어디 성형을 했네 악플을 단다. 직장동료의 어리숙한 모습에 착한 척한다고 뒤에서 욕하고 따돌리면서 사실관계조차 확인되지 않은 연예인 학교 폭력 뉴스에는 처벌받아야 된다고 핏대를 세운다. 명품 소비가 과한 친구를 사치스럽다고 흉보면서 친구가 구매한 물건을 본인 SNS에 올린다. #샤*백#쇼핑#성공적
이렇듯 어느 누구도 쉽게 애나 소로킨을 비판할 수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