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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 도착하자마자, 떠나기 전의 이야기가 도착했다

활주로에 닿는 순간, 한국의 밤이 내게 돌아왔다

by 헬로 보이저


호주로 떠나기 하루 전,
샘에게서 전화가 왔다.

“Julie, 가기 전에 맛있는 거 사줄게. 시간 괜찮아?”

이상하게도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내 머릿속에 맨 먼저 떠오른 것은
화려한 스테이크도, 유명한 레스토랑도 아니었다.

짭조름한 간장게장.
집에서 한 숟가락 떠먹던 그 오래된 맛.

“그럼… 간장게장 먹으러 갈래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샘은 한국 사람도 아니면서
“좋아, 가보자.” 하고 웃었다.

그 웃음이,
이별을 앞둔 우리 사이의
작은 온기 같았다.

우리는 천천히 게살을 발라 먹으며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의 문을
아주 조용히 열었다.

식당에서 나와 가까운 카페에 들어갔다.
밖에는 겨울바람이 유리창을 스치고,
안에는 따뜻한 공기가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샘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미국과 홍콩,
두 세계 사이에서 살아온 사람.
그가 꺼내놓은 말들은
뉴스에서 듣는 정치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실감’에 가까웠다.

“Julie… 미국은 너무 오래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어왔어.”

그 말은 작았지만
마음 안쪽에서 오래 울렸다.

샘이 말한 ‘중심’이란
힘, 돈, 패권, 전쟁…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세워진
오래된 질서를 의미했다.

샘은 말했다.

미국은
전쟁이 산업이 되고,
돈의 흐름을 장악하는 것으로
세계의 중심을 유지해 왔다고.

“달러가 세계의 언어였으니까.
그걸로 뭐든지 결정할 수 있었지.”

하지만 지금 그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러 나라가 스스로의 기술을 만들고,
스스로의 금융 체계를 만들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 나라가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아니야.
세계는 ‘단극’에서 ‘다극’으로 움직이고 있어.”

힘의 축이 서서히 이동하는 과정은
뉴스보다 훨씬 조용하다.
그러나 개인의 삶으로는
더 큰 파도처럼 밀려온다.

집을 잃는 사람들,
의료비를 감당 못하는 노년들,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젊은 세대들.

샘은 그 현실을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보아왔다.

그래서 그는
그 세계에서 조금씩 멀어져 나왔다.

샘의 말은
거창한 국제정치가 아니라
결국, ‘사람 이야기’였다.

힘이 바뀌고
질서가 바뀌고
돈의 흐름이 달라질 때,

가장 먼저 흔들리는 건
대단한 이념이 아니라
아주 작은 하루의 구조였다.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고,
누군가는 병원비에 무너지고,
누군가는 희망을 먼저 잃는다.

샘은 말했다.

“세상이 변하면,
가장 먼저 상처받는 건
항상 일반 사람들부터야.”

그 말이,
유난히 오래 남았다.

긴 이야기가 끝날 즈음
샘은 조용하게 웃으며 말했다.

“Julie, 난 나이 들어도 계속 움직이고 싶어.
요리하고, 여행하고, 사람 만나고, 골프 치고…
그냥 살아 있다는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아.”

그 말은
세계관도, 이념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인간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원하는 것.
‘내 삶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세계가 흔들려도,
패권이 바뀌어도,
결국 인간은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하루를 원한다.

샘도,
나도 그랬다.



비행기의 문이 열리자
기내의 차가운 공기가 뒤로 밀려나고
남반구의 여름 냄새가 천천히 밀려왔다.

햇빛 아래에서 익어가는 흙냄새,
어딘가 초록빛이 비치는 따뜻한 바람,
새벽 전에 깨어 있는 도시의 낮은 웅성임.

발끝이 처음 시드니의 땅을 딛는 순간
마치 몸이 아주 얇게 갈라지며
새로운 하루가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 모든 감각이
이 글과 함께 맞물려 도착했다.

이 글이 당신에게 닿는 지금,
나는 시드니의 빛 속에 서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만나게 될지,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는지,
그리고 또 다른 세계의 속도는 어떤지

그 모든 이야기를
오늘부터 천천히, 숨을 고르듯 풀어가려 한다.

여기서부터
내 시간은 다시 시작된다.
새로운 공기 속에서,
처음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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