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을 아는 로맨스는 잔인하다.

넷플릭스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

by 작가 미상











'아버지의 기일을 미리 알았다면 더 좋은 아들로 기억됐을까?'




이 질문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떠난 아버지에 대한 슬픔

좋은 아들이지 못한 미안함

답을 망설이는 나 자신.





우린 종종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 마치 게임처럼, 결과를 미리 알았다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거란 믿음. 이것이 우릴 괴롭게 한다. 우리가 후회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말을 알고 하는 게임이 항상 흥미롭고, 유쾌한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모든 이야기의 끝을 알고 살아가는 인생은 지루함 그 자체일 것이다. 관계의 끝을 알고 있을 때, 우린 서로에게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까? 어떤 것에도 일말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 고요의 상태일 테다. 이것이 열반의 경지가 아님은 확신한다. 잔잔한 호수보단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블랙홀에 가까울 테니.





그럼에도 우린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반복해서 본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다시 보는 것. 효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행위를 우린 왜 할까?



이건 이야기의 머리와 꼬리가 아닌, 몸통 어딘가에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결과가 아닌 과정 속, 감정의 결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아닐까? 긴장, 설렘, 기쁨과 슬픔의 파편들을 곱씹는 그 순간을 붙잡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인생은 결과보단 과정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삶의 끝은 모두에게 차별 없이 죽음뿐이니까.





요즘 나에겐 넷플릭스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가 이 감정들의 발화장치다. 마치 그 해 여름 제주에 그들과 함께했던 기분이다. 과거를 회상하듯, 그리울 때마다 그 곳으로 간다.



로맨스의 결말을 안 채 다시 보는 그들의 관계는 씁쓸하다. 그의 노력이 의미 없음을 알고, 그녀의 웃음이 언제 울음으로 바뀔지도 안다. 그렇기에 출연자들의 말과 행동은 더 서늘하게 다가온다.




‘아무리 노력해도 너희는 결국 이어지지 못해.’

‘다 부질없어.’




마치 신이 인간을 내려다보듯 속삭이는 내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쓰라린 기억이 떠올라 썸네일조차 보기 힘든 화도 있다. PTSD처럼 다가왔다. 직접 겪은 일도 아닌데도 말이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보고만 있어도 이처럼 고통스러운데?”





이렇게 나약하고 어리숙한 내가

영화나 드라마만 봐도 몇 날 며칠을 여운에 빠져 사는 내가

그 두려움에 기꺼이 들어갈 수 있을까?

구명조끼도 없이 무얼 믿고 깊은 바다에 몸을 던질까?

모두가 그렇게 빠지는 걸까?

안전장치를 찾고 있는 나의 모습조차 나약하기 그지없다.





최근에 본 한 소설 속에선 사랑이란 감정을 병이라 칭한다.

울다 웃고, 제정신으로 일할 수 없으니 증상만 놓고 보면 중증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때면 약을 먹는다. 기괴하면서도 한편으론 부럽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 테니.





내 몸에 스위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맘대로 켜고 끌 수 있는.

사랑도 그렇게

그들의 결말을 보고 허우적대는 나의 감정도 그렇게

단번에 끌 수 있는 불빛처럼 사라졌음 좋겠다. 아니 좋을까? 참 이것도 헷갈리는데 내가 무슨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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