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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는 왜 낯설고 불편할까?

익숙함의 기준을 묻는 음악적 감각 실험

by 백현선

즉흥연주는 산만하고, 스캣은 이상하게 들린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어떤 이는 “이건 아프리카 사람들 음악 같아서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 “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재즈라는 음악이 어떤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곧 의미 없음을 뜻하진 않는다. 아프리카 언어가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그 언어와 문화를 경험해 본 적 없거나, 혹은 이해 가능한 범주가 너무 좁기 때문이다.


재즈도 마찬가지다. 즉흥연주와 스캣이 불편하게 들리는 건, 그것이 어떤 역사와 문법 속에서 나왔는지를 모른 채 소리만 접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음악이 단순히 ‘이국적’인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African-American music이라는 점이다. 노예제와 인종차별의 역사 속에서 태어난 소리이며, 억압과 생존, 공동체의 기억을 품고 전해져 온 형식이다. 이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아프리카 음악 같아서 이상하다’는 식의 평가는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는다.


사실 나 역시 처음에는 재즈가 낯설었다. 즉흥연주는 알 수 없는 소리들의 나열 같았고, 감정이입은커녕 어지럽기만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음악이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 어떤 맥락 속에서 그런 선택이 나오는지를 알게 되었고, 그제야 이전에 불편했던 그 낯섦이 가장 흥미로운 지점으로 바뀌었다.


음악은 종종 언어에 비유된다. 재즈의 즉흥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화성’, ‘리듬’, 그리고 연주자들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언어 위에 존재한다. 문법을 모르면 아무리 정교한 대화도 잡음처럼 들린다. 나에게 미국의 슈퍼볼 경기가 재미없는 것처럼, 이해하지 못하면 그 안의 치밀한 전략이나 역동성은 공허하게 느껴질 수 있다


김치나 한국식 피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는 짜고 맵고 군내 나는 음식일 수 있고, K-팝의 가사는 어떤 이에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소리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문화의 문법과 맥락을 알고 나면, 그 안에 담긴 고유한 질감과 의도를 비로소 느끼게 된다. 그 낯섦 앞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불편하다고 밀어낼 수도 있고, 그 불편함을 계기로 자신의 감각을 확장해 볼 수도 있다. 더구나 재즈 뮤지션이라면, 그 낯섦을 인정하고 왜 그렇게 들리는지를 스스로 탐구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물론 모두가 재즈를 좋아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한국식 피자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 입맛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탈리아 피자가 잘못된 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충분히 접해보지 않았을 뿐, 그 안에도 경험할 만한 세계가 존재한다.


재즈도 그렇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낯설다고 여기는 많은 것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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