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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모퉁이에서 피어나는 목소리

화려한 도시와 쓸쓸한 허무 사이에서, 빌리 스트레이혼이 남긴 노래

by 백현선

좋아하는 재즈 발라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빌리 스트레이혼의 “Lush Life”를 떠올린다. 뉴욕에 살기 전에도 이 곡의 복잡한 화성과 우아한 멜로디에는 매력을 느꼈지만, 그 가사가 품은 진심, 허무와 냉소, 그리고 체념 너머의 기품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하지만 뉴욕의 웨스트 빌리지에서 몇 해를 지내면서, 특히 지하철의 진동이 전해지는 벽돌 건물 속에서, 또는 비좁은 재즈 클럽의 습하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음악을 듣고 노래하게 되면서, 이 곡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왔다. 누군가가 남기고 간 찻잔처럼, “Lush Life”는 그 공간의 잔향과도 같은 곡이다.


빌리 스트레이혼은 1915년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피츠버그에서 자란 흑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다. 1930년대 후반 듀크 엘링턴에게 발탁되어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Take the ‘A’ Train”의 작곡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10대 시절에 작곡한 “Lush Life”는 지나치게 성숙하고 복잡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곡이 되었다.


그 안에는 10대에 겪는 풋사랑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사랑에 실패한 자의 체념이 담겨 있고, 반복되는 사교의 끝에 불쑥 침잠하는 허무가 흐르며, 우아하게 조각된 무관심이 있다. 나는 이 곡을 듣고 부를 때마다 뉴욕이란 도시가 품은 이중성, 기회의 땅이자 고립의 무대, 영감을 주면서도 날카롭게 소외시키는 공간을 함께 느낀다.


앨리샤 키스의 “Empire State of Mind”나 프랭크 시나트라의 “New York, New York”이 떠올리는 뉴욕은 장대하고 낭만적이다. 하지만 “Lush Life”는 그 뒤편, 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길목에서 더 가까이 들려오는 노래다. 나는 이 곡을, 그리고 그 곡이 말하는 도시의 모퉁이를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 내 앨범에 담았다.


요즘은 재즈가 도시와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노래를 부르며, 이 도시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곁에서 들여다보는 사람이 된다.


거기에 더해, 소수자인 흑인이라는 정체성 안에서도 다시 소수자인 성소수자로서, 예견되는 불이익에도 자신을 감추지 않았던 스트레이혼의 삶을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 이곳에서 ‘나’로 실재하고 있는가를 되묻게 된다. 삶의 배경도, 시대도, 무대도 다르지만, 그가 남긴 음악을 통해 나는 계속해서 나의 위치를 질문받는다. 이 도시에서 나의 목소리는 누구에게 닿는가. 나는 누구의 이야기를 노래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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