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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밥, 위기의 미학과 재즈의 정체성

한 시대의 반란이 남긴 것

by 백현선

음악학자 레오 트레이트러(Leo Treitler)의 “위기 이론(Crisis Theory)”은 예술이 진화하는 결정적 순간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개념이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아놀드 쇤베르크는 19세기말 음악적 위기 속에서 전통 양식을 해체하고 새로운 미학을 추구하며 현대 클래식의 기틀을 마련했다. 재즈 역시 유사한 경로를 밟았다. 1940년대, 스윙 음악이 상업주의에 매몰되며 반복적이고 표준화된 양식으로 정체되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비밥이 등장했다. 이는 단순한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라, 예술의 자율성을 되찾고자 한 미학적이고도 정치적인 반란이었다.


비밥은 재즈를 다시 예술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위기의 해소’로 읽힌다. 빠른 템포, 불규칙한 리듬, 복잡한 화성, 해체된 구조는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는 단순한 음악적 진보가 아니라, 재즈가 더 이상 나이트클럽의 배경음악으로만 소비되는 것을 거부한 선언이었다. 즉흥이라는 형식 안에서 비밥은 개인의 목소리와 집단의 상호작용이라는 재즈의 본질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이 혁명의 뿌리는 음악의 미학 너머에 있다. 비밥은 흑인 예술가들이 문화적 주권을 되찾기 위한 정치적 시도이기도 했다.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는 백인 중심의 음악 산업 구조에 맞서면서도 의도적으로 인종 혼합 밴드를 구성했다. 이 같은 포용은 재즈가 인종의 경계를 넘어 확장될 수 있는 예술이라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문화 전유(cultural appropriation)”와의 경계를 흐리는 지점이기도 했다.


비밥 이후 재즈는 ‘미국 클래식’이라는 명명 아래 세계화되었다. 미국, 유럽,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재즈는 다양한 지역적 언어와 결합하며 변모했다. 하지만 재즈의 근원이 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적 감각과 역사적 맥락은 점점 더 흐려지고 있다. 즉흥 연주라는 형식만 남은 채 정체성의 뿌리가 탈맥락화되는 현상은, 재즈가 진정 누구의 목소리였는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제기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지점은, 모던 재즈의 부흥기 주 소비층이 중산층 이상의 백인 비트 세대였다는 사실이다. 비밥이 초기에는 상업적 성공과 거리가 있었음에도, 이후 이 전위적인 음악을 가장 먼저 소비하고 ‘예술로서의 재즈’를 담론화한 것은 결국 비트 세대와 유럽의 평론가들이었다. 이는 재즈가 누구에 의해 창조되었고, 또 누구에 의해 해석되고 소비되었는지를 나란히 놓고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미리 바라카(Amiri Baraka)의 비평은 강력한 문제 제기를 담고 있다. 그는 비밥을 “위에서 내려온 양식이 아닌, 부르주아 문화를 상대로 한 아래로부터의 반란”으로 보았으며, 상업주의에 맞서 ‘분리된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관점은 재즈를 자본주의적 흡수에 저항하는 흑인 민중 예술로 위치시키며, 예술과 정치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했다.


하지만 바라카가 제시한 ‘순수한 분리’는 현실적으로는 거의 존재한 적이 없었다. 재즈는 처음부터 라디오, 레코드사, 평론가 등 백인 주류 산업과의 복잡한 얽힘 속에서 형성된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비평은 이념적으로 강력하지만, 때론 세밀함을 잃고 이분법적 시선에 갇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지금껏 ‘미학적 혁신’으로만 소비되던 재즈에 정치적 맥락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더 나아가, 철학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비밥은 특정 창작자들의 고립된 표현이라기보다, 그 시대가 공유한 역사적 이해의 지평을 드러내는 상호작용의 산물이었다. 재즈를 해석하는 공동체가 바뀌면, 음악의 의미 역시 전환된다는 이 관점은, 재즈의 ‘정체성 위기’를 단순한 상실이 아닌 문화적 해석의 이행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동시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시선으로 본다면, 비밥은 감각의 분할을 교란한 사건이었다. 즉, 들을 수 없던 소리를 중심에 놓고, 경계 밖에 있던 이들의 미학을 예술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급진적인 정치적 행위였던 것이다.


결국 예술은 얼마나 정치적일 수 있는가? 예술적 정체성은 산업 구조로부터 어떻게 독립할 수 있는가? 재즈는 바로 이 질문의 실험장이자 은유다. 자유롭게 즉흥하는 듯하지만, 타자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해야만 하는 재즈의 형식은 고립된 자율성이 아닌, 상호 의존적인 자유를 보여준다.


오늘날 재즈는 글로벌한 예술이 되었고, 다양한 언어와 문화 속에서 해석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재즈는 분명 풍성해졌지만, 동시에 그 뿌리가 흐려지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 재즈가 단지 즉흥이라는 기교만을 남긴 채, 그 정체성을 잃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바로 이 질문 자체가 재즈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재즈는 끊임없이 변주되고, 다시 정의되는 음악이다. 변화와 정체성 사이의 긴장을 품고 살아가는 음악. 그래서 재즈는 여전히 위기 속에 있으며, 그 위기야말로 재즈를 예술로 유지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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