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조용한 혁신가, 조 헨더슨을 기억하며
재즈 색소폰 연주자 조 헨더슨(Joe Henderson, 1937–2001) 그는 재즈 역사상 가장 개성 있는 테너 색소폰 연주자 중 한 명이지만, 오랜 시간 동안 상대적으로 저평가받아 왔다. 존 콜트레인의 수퍼스타적 명성에 가려졌던 측면도 있지만, 헨더슨은 전혀 다른 멜로디 언어와 사운드 감각을 지닌 연주자였다. 나 역시 그가 연주한 “Black Narcissus”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아, 내 앨범에도 직접 수록한 바 있다.
미국 오하이오주 리마 출신인 헨더슨은 1962년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블루노트 레이블과 계약했고,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 시기 트럼페터 케니 도햄(Kenny Dorham)과의 협업은 그의 데뷔 앨범 Page One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Recorda Me”, “Blue Bossa”, “La Mesha” 등에서 헨더슨의 어두우면서도 유연한 테너 사운드는 도햄의 따뜻한 음색과 대비되며 특유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그 사운드는 당시 하드밥과 모달 재즈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조합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어진 Inner Urge, Mode for Joe 등 블루노트 시절의 앨범들은 그의 작곡 기법과 즉흥 연주의 감각이 가장 빛나던 시기로 평가된다. 동시에 그는 호레이스 실버, 리 모건 등과도 활발히 협업하며, 1960년대 뉴욕 재즈 씬의 중심인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1967년 Milestone 레이블로 이적하면서, 헨더슨의 음악은 당시의 재즈 씬에서 다소 중심에서 벗어난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이 시기의 앨범들은 연주와 작곡 양면에서 매우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지만, 상업적인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전자악기와 라틴 리듬, 앨리스 콜트레인과 협업으로 스피리추얼적 요소의 도입 등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음에도, 마일스 데이비스 식의 퓨전과는 결을 달리했기 때문에 “퓨전 재즈”라는 이름으로 분류되기도 애매한 점이 있다. 오히려 헨더슨은 당시의 흐름 속에서도 자신만의 음악적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그의 음악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Verve 레이블과의 작업을 통해서였다. Lush Life, Double Rainbow, Porgy & Bess와 같은 앨범들에서 헨더슨은 한층 깊어진 해석력과 농익은 테너 사운드를 들려주며, 명곡들을 재해석해냈다. 특히 Lush Life는 그래미 수상작이 되었고, 그는 생애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이 쌓아온 음악 세계에 걸맞은 평가를 받게 된다.
이 시기의 부활은 단순한 유행의 귀환이 아니었다. 1960~70년대 재즈 씬이 겪은 민권운동, 상업화, 블루노트의 쇠퇴 같은 정치사회적 격변 속에서 헨더슨은 자기 음악을 지키면서도 시대와의 접점을 모색한 연주자였다. 그 복합적인 궤적은 오늘날 더욱 주목할 만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영향은 이후 세대의 연주자들에게도 뚜렷하게 이어진다. 마크 터너는 “헨더슨은 리듬과 프레이징, 그리고 그룹 속에서의 소통에 있어 대가였다”라고 말하며, 그를 자신의 주요한 음악적 뿌리 중 하나로 언급한 바 있다. 조슈아 레드맨 또한 헨더슨의 피아노 없는 트리오 포맷을 탐구하며, 그가 남긴 사운드와 자유로움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조 헨더슨의 음악은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의 연주자들에게도 살아 있는 언어다. 그가 남긴 멜로디와 리듬,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만의 사운드’는 세대를 넘어 여전히 새로운 감각으로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