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닿지 않는 것을 부르려는 욕망
재즈 보컬리스트에게 가사는 해석의 도구이자 족쇄다. 말과 멜로디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임무이지만, 그 말은 때때로 내 몸보다 먼저 나를 규정한다. 특히 ‘틴 팬 앨리’(Tin Pan Alley) 계열의 스탠더드를 부를 때, 가사는 이미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어떻게 다르게 말할 것인가’보다 ‘얼마나 잘 말할 것인가’가 중심이 된다. 표현의 자유를 허락받기보다, 기성의 해석을 갱신하는 기술자가 된다.
물론 적극적인 리하모니제이션을 비롯한 편곡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사의 정서와 무관한 극단적 변형은 쉽게 이질감을 낳는다. 예컨대 Moonlight in Vermont처럼 섬세하고 서정적인 곡을 프로그레시브 록 스타일로 편곡한 한 버전을 들었을 때, 나는 감정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웠다. 곡이 말하려던 것을 편곡이 가로막는 듯한 느낌. 가사는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곡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결정하는 정서적 중력처럼 느껴진다.
반면, 즉흥 연주 속에는 조금 더 나답다고 느낄 공간이 존재한다. 악기의 연주자들과 한 호흡으로 반응하고, 어긋나고, 부딪히는 순간들. 정해진 형식 안에서도 감정은 틈을 타고 흘러나오고, 때로는 말보다 먼저 닿는 울림이 있다.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은 ‘실재계’(le Réel)라는 개념을 통해, 언어로는 결코 붙잡히지 않는 차원을 설명한다. 상징계(언어, 규범)나 상상계(이미지, 환상)로도 포착되지 않는 감각. 실재계는 표현의 바깥에 존재하며, 우리는 결코 그것에 완전히 도달할 수 없지만, 끊임없이 그 결핍의 자리를 향해 나아간다.
즉흥은 그 실재계에 닿으려는 몸짓이다.
우리는 코드 위에서 연주하고, 곡의 형식 안에서 노래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매 순간 어긋나고 미끄러진다. 나는 그 불완전함 속에서 노래한다. 음이 흔들리고, 호흡이 새고, 의미를 만들지 않는 소리들.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침묵 속에서조차 오히려 가장 나다워질 수 있다.
그렇다면, 재즈 보컬리스트란 누구인가?
스탠더드 팝을 재즈 밴드와 부르면 재즈 보컬인가? 블루스 스케일을 쓰고 스캣을 하면? 혹은 악기처럼 자유롭게 즉흥 연주를 할 수 있어야만 그 자리에 닿는가?
재즈 보컬은 장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태도이며 언어 바깥으로 향하려는 욕망이다. 그 욕망은 특정한 기술이나 레퍼토리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가사를 노래하든, 스캣을 하든, 때론 침묵하든, ‘무엇을’ 말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는지가 중심이 된다.
나는 무대 위에서 말하기 위해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로 닿지 않는 것을 발화하기 위해 노래한다. 실패와 미끄러짐, 반복되는 어긋남 속에서 나는 여전히 노래한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재즈 보컬리스트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