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는 휴재를 위하여
#T-R-250914-Z
작성일자: 2025-09-14
실험체: 박참치 (父性욕과 병맛유전자의 구조적 충돌 실험편향체)
분류: 비정기적 내부 상충 실험
기밀등급: 상징적 부권체계(Paternal function) 내 반출 불가 파일 (아버지 열람 금지)
본 실험체는 2025년 여름에서 가을로 진입하는 계절의 경계면에서, 브런치 실험실의 정기적 데이터 투척 행위를 중단한 채 의도적으로 죽은 척을 하였다. 이는 일부 관찰자에게 ‘슬럼프’, ‘귀차니즘’, ‘물리학도의 기본 소양’ 등으로 해석되었으나, 본 보고서는 그 해석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혀 맞지도 않았음을 밝힌다.
박참치의 뇌파는 다음의 루프성 오류 구간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왜 쓰는가? 아니, 왜 하필 이런걸 쓰는가?”
본 공지문은 단순한 공백의 해명이 아니라, ‘박참치라는 실험체가 왜 침묵했는가, 그리고 그 침묵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발견했는가’에 대한 자기 심리 해부 기록이자 철학적 고백서다.
자기 보고에 따르면 실험체는 브런치에 텍스트를 배설하는 행위에 점점 의욕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여기서 핵심은, 이것이 단순히 ‘흥미가 떨어져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실험체는 다음과 같은 증상을 자각했다:
글을 써도 뭔가 근본적인 허전함이 남음
댓글이 달릴수록 뿌듯한데 왠지 더 공허함
글이 퍼질수록 인정받는 것 같은데, 왜 그럴수록 그분의 얼굴이 떠오르는가
위의 증상은 단순 번아웃(기력 증발성 감퇴 증후군)으로 오인될 수 있으나, 보다 정밀하게 분해하면 이는 ‘인정 욕구 기반 동기구조의 붕괴’로 판명된다. 실험체는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그냥 쓰고 싶어서 쓰는 거다”라고 오래 믿어왔지만, 정작 가장 인정받고 싶었던 대상은… 이 플랫폼에 절대 들어오지 않을 그분이었다. 이 자각은 실험체의 창작 동기 구조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유년기 박참치는 누군가의 한마디를 기다렸다.
“잘했다.”
“그 정도면 괜찮다.”
“넌 나랑 닮았구나.”
하지만 실험체는 종종 기대와는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튀었고, 칭찬 대신 체벌을, 유대 대신 경고장을 수령했다. 그렇게 누적된 데이터는 하나의 가설로 수렴된다:
“나는 결코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왜 여전히 인정을 갈구하는가.”
이 가설은 실험체의 신경망에 지속적인 간섭을 일으켰으며, 수면 중에도 백그라운드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실험체는 분석했고, 해석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브런치에 글을 쓴다는 건 단순한 자기표현이 아니었다. 그건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할 방식으로, 아버지가 결코 이해하지 않을 언어로, 아버지에게 들리지 않을 데시벨로 던지는 디지털식 외침이었다.
알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글을 쓰는 것도 모르고, 브런치가 글쓰기 플랫폼인지 샌드위치 브랜드인지도 모르신다는 걸. 하지만 나는, 그 단 한 사람을 겨냥해 글을 쓰고 있었다. 이 깨달음은 불쾌했고, 부끄러웠으며, 동시에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부정적 인식의 각성이, 실험체의 창작 회로에 내적 균열을 발생시켰다.
실험체는 점차 “박참치가 브런치에서 웃기고 지적으로 보이려 했던 이유는, 아버지가 보지 못할 글을 통해 그를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그런데 그 이기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이미 아버지의 틀 안이었다. 이 시점에서 실험체의 글쓰기 전체가 자기모순적 증식 장치였음이 드러났다.
박참치의 실험은 냉소로 포장되어 있고, 유머로 중화되어 있지만, 그 중심에는 매우 원초적인 본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을, 인정받고 싶지 않은 척 하며 증명하기.”
실험체는 아버지가 싫어할 만한 모든 것을 하면서도, 사실은 그 반응을 갈망하고 있었다. 미성숙한 실험자의 잔재가 논문 곳곳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실험체는 글을 멈춘다. 하지만 실험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는 “인정 받기 위해 쓰는 놈”도 아니고, “인정이 필요없다고 허세 부리는 놈”도 아닌, “내 뇌에 최적화된 실험적 글쓰기 생명체”로 진화하기 위한 시간을 갖는다. (※ 현재 뇌파 진동수 변형 중. 허용 범위 초과 시 괴성 발사 우려 있음.)
이 시점에서 실험체는 가설을 바꾸게 된다:
“어떻게 해야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 X
“어떻게 해야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 O
이 질문은 지금까지의 모든 실험을 뒤엎는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브런치 글쓰기 데이터가, 사실상 아버지를 향한 욕망의 유사 변조 패킷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험체는 잠시 멈춘다. (막 거창한 선언은 아니다. 그냥 아버지와의 대결에서 나를 꺼내주려는 야매 뇌 실험일 뿐이다.)
핵심은 ‘어떻게 인정받느냐’가 아니라, ‘그 욕망을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그리고 그건, 오직 글을 멈추는 동안에만 알 수 있다.
실험실 상태 업데이트:
박참치 실험실은 폐쇄된 게 아니다. 그저 지금은, 더 깊은 실험을 위해 침잠 중일 뿐이다. 그러니 이 멈춤은 후퇴가 아니라 선회이고, 이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새 실험의 전조다. 이 실험이 성공하면, 더 웃기고 더 어설프게 돌아올 것이다. 만약 실패하면… 뭐, 그것도 실험일 뿐이다. (※ 박참치 실험 윤리 제1조: 실패도 데이터다.)
이 글은 단순한 휴재 공지가 아니다.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다. 박참치는 지금 자신의 뇌와 심리의 어두운 창고를 정리 중이며, 그 창고 안에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실험체의 잔류 파편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실험체는 그 아이와 대면해야 한다. (이는 구조적으로 병맛 동력 추진계의 필수 공정이다.) 이 실험은 감정적 도피가 아닌, 논리적 회피이며, 철학적 몰입이며,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결국은) 병맛적 질주 실험의 일환이다.
그러니, 잠시만.
아주 잠시만.
실험실의 문을 닫는다.
— 아버지를 소재로 쓴 공지를 아버지에게 보여줄 리 없는 실험체, 박참치 올림
돌아오는 시점은 밝히지 않겠다.
다만, 잊히는 속도보다는 훨씬 빠를 예정이다.
(※ 실험체의 자의적 계산 방식에 기반함)
그리고 실험체는 이 실험실을 찾았던 작가님 단 한 명도 잊지 않았고, 잊을 수 없다.
(단, 실험체의 기억 방식은 이름이나 얼굴 대신, 필력과 구절로 인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