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의 확신은 이내 실제가 되어 내 주변에서 일어났다.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니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 6:17)
엘리사를 잡기 위한 아람 왕에 의해 도단 성이 포위되고 엘리사의 종은 그 현실을 목격한다.
엘리사는 이미 믿음으로 그 현실을 보고 있었지만 종은 두려움 속에 갇혀 있었다.
하나님은 그(종)에게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는 것" (히11:1)
이라는 진리를 직접 체험하도록 하셨다.
그 이유는 '믿음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실재에 서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함 이였음을, 신학적 해석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밤의 확신은 이내 실제가 되어 내 주변에서 일어났다.
8평 남짓한 집이었다.
한 가족이 몸을 눕히고 하루를 견뎌내기엔 간신히 허락된 크기였다.
집주인은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그나마 옆방 하나를 세 놓았다.
그렇게 협소한 공간 안에서 두 가족은 서로의 생활음을 견디며 살아가야 했다.
벽을 사이에 두고, 사생활과 생계가 동시에 얇아졌다.
전세금은 70만 원.
살림은 어렵게 시작되었고, 현실은 단 한 푼의 불필요한 지출도 용납하지 않았다.
부엌조차 없는 방,환경이었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선택지가 아닌 최선이었다.
최소한의 조건으로 버텨야 하는 삶이었고, 그 사실을 부정할 여유 또한 없었다.
집 골목 입구에 작은 간판 하나를 내걸었다.
‘양장 수선 전문.’
좁은 골목 입구에 걸어 놓기에는 썩 맞지 않는 간판이라는 생각이 었지만,
하루를 이어가기엔 반드시 필요했던 표식이었다.
그 간판은 직업이기 이전에, 가족을 향한 책임의 선언에 가까웠다.
집으로 들어가기까지는 15미터 남짓한 거리를 지나야 했다.
두 개의 비교적 높은 계단을 딛고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마당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협소한 빈 공간이 먼저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비교적 가파른 두 계단을 올라서야 비로소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집도, 방도 모두 바깥 지면보다 꽤 높은 위치에 지어져 있었다.
일상의 동선마다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구조였다.
그 불편함은 단순한 신체적 수고에 그치지 않았다.
매일의 삶이 그렇듯, 감수해야 할 몫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했다.
집주인 여인은 나보다 한 살 많았다.
나이 차이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우리는 금세 친구처럼 지냈다.
삶의 무게가 비슷해서였는지,
아니면 서로의 말 사이에 흐르던 마음의 결이 닮아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인연을 따라,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다니던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곳에는 말씀에 신실한 목사님이 있었다.
나는 그분의 설교 앞에 앉아, 한동안 흩어져 있던 신앙을
다시 차근차근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무너진 것을 단숨에 회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견뎌내는 시간을 통해 다시 형성되는 믿음이었다.
채 발효되지 못해 설익어 있던 조각 같은 믿음들은
말씀을 거듭 들을수록 서서히 자리를 찾아갔다.
급히 결론에 이르려 하지 않아도,
말씀은 스스로의 무게로 내 안에 머물며 신앙의 형태를 갖추어 갔다.
그 과정 속에서 내 영혼은,
그 빛을 따라 하나님께 한 걸음씩 더 깊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회복된 삶을 다시 누리게 되어서였을까.
하루하루가 유난히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사소한 일들 앞에서도, 불평보다 감사가 먼저 입술에 올랐다.
영적으로 새 힘이 공급되자, 일상의 감각 또한 달라졌다.
여전히 작은 공간이었고 형편은 빠듯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평안과 기쁨이 반복해서 솟구쳤다.
예배 시간은 하루의 끝이 아니라,
하루를 견디게 하는 기대의 출발점이 되었다.
가끔 앞집에 살던 소녀가 우리 집에 놀러 오곤 했다.
어느 날, 방 앞 계단에 앉아 아이들과 어울려 놀던 그 아이가
문득 생각이 난듯, 뜻밖의 말을 조용히 꺼냈다.
“이 방요… 예전에 무속인이 살았던 곳이에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식어 내려가는 듯했다.
소녀는 무언가를 전해 주고 싶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무속인이 방안 온 벽에 이상한 그림들을 잔뜩 붙여 두었고,
굿도 여러 차례 했었다고 했다.
소녀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말투에는 어떤 의미 부여도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 그 한마디는,
예고 없이 날아온 돌처럼 마음 깊은 곳을 정면으로 건드렸다.
설명할 수 없는 싸한 파문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가슴 안에 번져갔다.
차라리 듣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말이었다.
오후 내내 마음은 정리되지 않았고,
방 안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마치 들어서지 말았어야 할 낯선 영역에 발을 들인 듯한 불편함이 밀려왔다.
그 감정은 전혀 산뜻하지 않았다.
가벼운 상상이나 기분 탓으로 넘길 수 있는 종류도 아니었다.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를 서늘한 기운이 주변을 맴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
점점 마음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날 밤, 어린 두 아이와 나란히 누워 있었지만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쉬 잠에 들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고른 숨소리 사이로
설명할 수 없는 압박감이,
마치 가슴 위에 조용히 내려앉은 것처럼 느껴졌다.
몸은 누워 있었지만, 마음은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했다.
영 편치 않는,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상태였다.
불편함은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다.
결국 더는 그대로 누워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하나님,
이 방에 예전에 무속인이 살았다고 합니다.
굿도 여러 번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습니다.
이 밤, 천군천사를 보내셔서
우리의 좌우를 두루 호위하며 지켜 주옵소서.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맡기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 하나가 또렷하게 일어났다.
영적 세력과 대적할 수 있는 군사.
나는 그것이 천군천사라고 믿었다.
아마도 요한계시록에서 읽었던,
영광과 위엄으로 충만한 그 천상의 군대의 이미지가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것일 지도 모른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계 12:7절)
나는 다시 아이들 곁에 누워,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날 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잠듬과 깨어 있음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집 안과 밖을 가르는 듯한ㅡ
공간을 초월해 울려 퍼지는 날갯소리가 갑작스레 들려오기 시작했다.
“푸드득— … 푸드드드드득!!”
그 소리는 놀라울 만큼 또렷했다.
환청이나 막연한 감각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명확한 물성이 있었다.
이성적으로 설명하자면,
거대한 날개가 공기를 힘 있게 가르며 일으키는 소리였다.
역동적인 날갯짓.
잠결 속에서도 그것이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어떤 치열한 대치—전투에 가까운 상황에서 발생한
강력한 날개짓임을 느낄 수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과는 다르게,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어둠을 가르며
방 안과 밖을 넘나들고 있다는 기운이 분명히 감지되었다.
공간을 초월해 치열하게 부딪히는 듯한 그 소리는,
지금 이곳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 천군천사가 악한 세력과 싸우고 있구나.’
그 생각은 길게 머물지 않았다.
스치듯 지나갔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확신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랫동안 날갯짓은 멈추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 소리를 듣고 있었는지는
시간으로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치열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질서 있는 움직임을
나는 또렷이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몸은 잠들어 있었으되 영은 깨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밤시간
영의 귀를 열어 주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믿음으로 드린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을
직접 확인하도록 허락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반드시 천군천사가 이길 것이라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확신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평안한 상태로
깊은 잠듬과 깨달음의 경계를 조용히, 떠다니고 있었다.
“땡그렁… 땡그렁…”
새벽예배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밤새도록 방 안과 밖을 쉼 없이 넘나들며
집 주변의 공기를 강하게 가르던 그 날갯짓ㅡ
치열한 전투의 한복판에 있는 듯
살아 있는 움직임으로 들려오던 그 ‘푸드득’ 소리는,
종소리가 울리는 바로 그 순간,
마치 모든 싸움이 끝나기라도 한 듯
단숨에, 정확히 멈추었다.
“아… 천군이 이겼구나.”
그 깨달음은 외침이 되기 전에 이미 확신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올랐고,
승리의 기운이 방 안의 공기와
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떤 이는 이 이야기를 두고
“실화인가요?” 혹은 “소설처럼, 또는 만화책에서나 읽을 법한 이야기로 들린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 의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게는 오히려,
그 밤의 생생한 느낌을 있는그대로 실감나게
옮겨 적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쉬웁기만 하다.
간증을 기록할 때마다
그때의 희열과 감격, 전율은 여전히 마음속에서 또렷이 되살아나지만,
그 모든 현장감을 언어 안에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내 지식적 표현의 그릇이 너무도 좁다는 생각이 든다.
더 설득력 있게,
더 정확한 언어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글을 쓰는 손끝에서는 언제나 부족함이 먼저 느껴진다.
그 한계 앞에서,
나는 오늘도 조심스럽게 그분의 도우심을 구할 뿐이다.
오직 내게 보이신 하나님을 증거할뿐인 맘으로..
아침에 눈을 뜨자,
전날 내 마음을 짓누르던 그 꺼림칙함과 불편한 기운은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에서 비롯된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설렘이었다.
밤새 이어졌던 편안함 속의 긴장은 더 이상 흔적을 남기지 않았고,
마음은 더 할 수 없는 평안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믿음으로 구할 때
하늘의 군사까지 보내시는 하나님.
그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응답 가운데,
내 마음은 다시 한 번
깊고 확고한 믿음으로 채워져 있었다.
서두에서 나열한, 환경만을 바라보던 엘리사의 종은
두려움 속에서 현실을 기준 삼아 판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는
진리를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체험을 통해 알게 하셨다.
믿음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조건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실재 위에 서는 것임을
성경은 일관되게 증언한다.
그것은 시대와 상황을 초월해
하나님 백성에게 요구되는 동일한 태도였다.
엘리사의 종에게 믿음의 눈을 열어 불병거와 불말을 보게 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그 밤,믿음으로 드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밤새 내 귀와 마음을 깨우며
분명한 방식으로 응답하셨음을 확인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떤 상황도 결국 평안과 기쁨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내 작은 마음은 또 한 번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 밤은
믿음의 굳건한 반석 위에
또 한 걸음 더 나가 서도록 이끄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고백하게 한 시간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주어진 상황 한가운데에서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응답하시는 분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