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주리라ㅡ"

그분의 시간표 앞에서..

by 에스더




양장 수선 전문.


골목 입구에 붙은 작은 간판 하나가 전부였다.


의상실을 운영하던 언니 곁에서 배운 기술이었고,
당장 할 수 있는 일로서, 살아내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일부러 찾아 들어와야 하는 골목 안쪽과 달리,
골목 앞 삼거리에는 이미 오래된 꽃집 겸 세탁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은 늘 그곳에서 멈췄다.


손님은 정말 잊고 지낼 즈음에야 한 사람씩 찾아왔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한 번 수선을 맡긴 사람은 다시 찾아와 주는 것이었다.


그 무렵 가장 큰 고민은 늘 하나였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일까.’


식생활에 무관심한 남편은 며칠씩 집을 비우기 일쑤였고,
지인 공장에 들렀다며 몇 날 며칠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늘 쌀집 주인이 부러웠다.


쌀집 앞을 지날 때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진열된 쌀 앞에 멈춰 서곤 했다.
윤기 도는 흰쌀을 지켜 볼 때면
아이들 얼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흰쌀밥 한 끼를 마음 편히 해주지 못하는 처지라는 사실이
그때마다 또렷해졌기 때문이다.


먹을 수 있는데 먹이지 못하는 일은
마음 깊이 아린 통증으로 자리한다.
가난은 단순히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조건이기도 했다.


그 결핍은 모성의 가장 연약한 지점을 건드렸고
마음을 참으로 서글프게 만들었다.


쌀집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속으로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아버지 하나님,
저기 있는 20킬로 쌀 자루 세 개만
집에 쌓아 두고 살 수 있다면 원이 없겠습니다.”


그 말은 간청이라기보다
눌러 두었던 마음이 새어 나온 탄식에 가까웠다.
쌀집 앞은 그렇게
내 삶에서 가장 절실한 바람이 고백되어지는 삶의 모퉁이었다.




외상을 부탁해야 하는 날이면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로 산다는 것은 때로
익숙하지 않은 문 앞에 서는 일이기도 했다.


구멍가게 앞을 몇시간 서성이다가
겨우 마음을 다잡고 들어가
밀가루 한 봉지, 또는 국수 한 묶음,
혹은 라면 몇 개를 외상으로 부탁하던 순간들.


선듯 건네지 못하는, 겸연쩍은 얼굴로 용기를 낼 때마다
가게 아줌마는 단 한 번도 싫은 표정도,

거절하지도 않으셨다.

그 조용한 배려의 마음이 고마워
친정엄마를 대하듯 마음이 따뜻해졌고

막막한 상황앞에 깊은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대부분의 끼니는
밀가루나 국수, 라면으로 이어졌다.





그날도 국수를 삶아 점심상을 차렸다.

반찬은 없었고 소금간이 최선이었다.


아직 발음도 서툰 아들이
젓가락을 제대로 쥐지 못한 채
국수가락을 올렸다 내렸다 하다 말고 말했다.


“밥, 주떼요.”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시 침묵하다가
애써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알았어.
배고프니까 어서 먹어.
엄마가 밥 해줄게.”


아이들은 마지못해 먹었고,
아들은 몇 젓가락 만에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주인 집 아이와 어울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상을 물리고 하나님 앞에 앉았다.


“아버지 하나님,
귀한 아이들을 맡기셨는데
엄마로서 너무 부족합니다.
아이들에게 밥을 해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세요.”


그때,

세미한 음성이 뇌리를 스치듯 들렸다.


“내일 주리라—”


“아버지 하나님,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고백이었고,

하나님과의 조용한 언약이었다.




이튿날,
동사무소 스피커에서 주민세 미납자에게
당일 납부를 독촉하는 방송이 시간을 두고 흘러나왔다.


천 원의 여유도 없던 형편에
오천 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모른 체할 수도, 빌릴 수도 없었다.


고심 끝에
동회장을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리고
면제를 요청하기로 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주민으로서도 가장 정직한 길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정을 들은 동회장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동사무소에서 20년을 일했지만
이렇게 정직한 사람은 처음 봅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회담당을 불러 다시 사정을 살피게 했다.


동성동본으로 혼인신고가 되있지 않아
한 가족으로 묶이지 못했던 사정이 드러났고,
호적을 정리하는 방법과, 그 후에
영세민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지하에 쌀이 남아 있다면
담아 주라고 했다.


지하 창고는 비어 있었다.


“아직 이번 달 쌀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사회담당자는 남아 있는 쌀을 모아
약 10킬로그램 정도를 한 자루에 담고,
보리쌀 15킬로그램 정도를 다른 자루에 담았다.


“어느 걸 가져가실래요?”


“보리로 하겠습니다.”


“쌀도 없다면서요?”


“네. 하지만 보리가 더 오래 먹을 수 있잖아요.”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보리 자루에서 몇 바가지를 덜어내고
그 안에 쌀 자루를 조용히 넣었다.


그렇게 쌀자루는 방 안까지 배달되어 왔다.
순간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끼니를 앞두고 가슴을 태우던
당장의 걱정이 멎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밥을 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감사해서 쌀자루를 앞에 두고 무릎을 꿇었다.


기쁨의 들뜬 마음으로 감사 기도 하는데
전날의 응답이 생각났다.


“내일 주리라—”


하나님은 인애로
신뢰를 넓혀 가시는 분이셨다.
하루를 맡기고
또 다른 하루의 공급을 기다리게 하시는
언약의 하나님.


‘내일’이란
오늘을 견디는 기다림 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하셔서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시는
그분의 시간표였다.


“아버지, 정말 오늘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며칠 동안은 쌀과 보리를 섞어 밥을 지었다.
그러다 쌀은 아껴 성미로 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병상을 지나 본 사람은 안다.
건강이 얼마나 귀한지를.
믿음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건강이었다.


끼니마다 한 사람에 한 숟갈씩 떼는 일은
가족의 몸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고,
나름의 방식으로 드리는 제물과도 같았다.




보리밥을 짓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물을 붓고 부어도
보리는 좀처럼 퍼지지 않았다.


나름의 긴 시간을 애썼지만

기억속 모친의 보리밥과는 차원이 다른 밥이 되었다.


탱글탱글한 보리알이 입안에서 굴러다녔다.
참기름 한 방울 없이 간장에만 비벼 먹는 식사 시간,
아이들은 작은 치아로 말없이 씹으려고 애썼고
지켜보는 엄마로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더욱 깊었다.


그럼에도
끼니를 걱정하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감사할 일이었다.


생활이 어떠하든,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하루를 함께 살아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기적과도 같은 현실이었다.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
늘 가까이에 계심을 보여주시는 분.

그분과의 교통만으로도
마음이 설레는 나날 속에서
그분의 응답은
어느새 내 삶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에게 베푸셨던 그 은혜를
내가 서 있을 믿음의 자리로
조용히 준비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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