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상상해 본다.
지인의 가족 장례식장에서 막 돌아와 클렌징을 마치고 책상에 앉았다.
장례식장의 여운이 마음 깊이 남아서, 그대로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조문 순서를 기다리며 상주로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서 있는 지인을 바라봤다.
슬픔이 가득한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친언니를 막 하늘나라로 보낸 지인의 마음을 감히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 슬픔의 무게가 내 감정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눈앞의 장면은 충분히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나는 ‘죽음’에 대해 자주 상상하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건 단순한 불안에서 비롯된 습관은 아니다.
불안도가 높은 사람은 아니지만, 오히려 너무도 현실적인 일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2017년 결혼식을 앞두고 예배신랑이 일본에 다녀와야 하는 일정이 있었다.
예비신랑이 일정을 취소하고 안 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나랑 같이 가는 것도 아닌데,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 하는 0.001%의 불행에 대해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출국부터 귀국 때까지 그 불안감이 있었다. 만약 정말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고가 생긴다면
나는 그때를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미리 생각하고 감당할 수 있는 나를 준비했던 것이다.
2021년 첫째 아기를 낳았을 때가 떠오른다.
유도분만을 하러 병원에 간 날. 가기 전날부터 생각했다.
나는 노산인데 내가 만약 아기를 낳다가 죽는다면.
상상하는 순간 눈물은 이미 볼까지 흘러내렸고, 슬픔이 나를 이미 감싸 안고 나는 그것이
사실이 된냥 그 슬픔 속에 잠긴다. 산부인과 로고가 박혀있는 보자기에 싸여있는 아기와
멍한 눈으로 안고 있는 나의 남편의 모습을 그려본다. 나는 이미 없는 상태이지만 남겨진
이들을 상상해 보는 일은 가벼운 일은 아니다.
2024년 둘째를 출산했을 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편은 이미 나를 파악했기에 이런 나의 이야기에 큰 반응을 하지 않지만 나는 이 일에 진지하다.
에이! 설마 하는 0.0001% 일에 나에게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상은 나를 슬프게만 만들지는 않는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내면의 작업이 일어난다.
무엇보다도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인정하는 시간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위대한 인간이어도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한낯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무릎을 꿇게 되는 시간이다. 그것은 나를 조금 더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볼 때 조금 더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의 장례는 더 특별하고 아팠다.
지인이 상주였고, 언니를 떠나보내는 자리였다.
그 언니는 나와 동갑이었다.
3년 전 암을 진단받고 항암치료를 하며 버텨왔지만, 끝내 하늘 나로 떠났다.
미혼이었고, 마지막까지 병상 곁을 지키며 간병해 온 동생은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도 너무 보고 싶다고.
나는 그 슬픔을 대신 느낄 수 없지만, 그 눈빛에 담긴 진심이 내게 전해졌다.
눈물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 나도 모르게 흘러내렸다.
죽음은 상상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같은 경험을 겪었다고 해서 타인의 아픔을 온전히 헤아릴 수도 없다.
그저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하늘아래 피조물
신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저 약간의 힌트를 좇으며 조물주의 뜻은 그러할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인간인 나와 우리.
오늘도 그렇게, 하늘 아래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나는 다만, 조금씩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해가는 중일뿐이다.
이제야 잠자리에 누웠다.
침대머리맡에 누운 아이의 숨소리가 고르고, 따뜻하다.
작은 손, 말간 얼굴, 고요한 숨결.
나는 오늘도 이 아이 곁에서 눈을 감는다.
내일도 나와 함께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