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통한 몸통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다른 손은 칼을 들어 몸통을 지그시 누르며 앞뒤로 몇 번 움직였다. 칼끝에서 도마의 둔탁함이 느껴지고 동그란 한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하늘에 배를 보이며 덩그러니 누워있는 것에는 까만 테두리 안에 알록달록 속이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지켜보는 갤러리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오예-에-! 김밥이다!”
이부자리 정리하며 이불을 한껏 공중에 띄웠다가 살포시 내리며 구김살 없게 펴듯이 커다란 김 한 장을 김밥 발 위에 정성스레 올렸다. 쓰고 있던 안경이 뿌옇게 변하도록 따뜻함이 솔솔 피어나는 밥, 고슬고슬하게 지은 하얀 밥을 한 주먹 퍼다가 “퍽”하고 김에 붙였다. 네모난 김의 맨 윗부분을 제외하고는 어디 한군데 차별 없이 골고루 밥알이 붙도록 이리저리 펼쳐대었다.
속 재료의 등장 차례. 오늘은 어떤 속 재료들이 대기 중일까? 얇고 짧은 당근 채들의 주황 물결을 먼저 맞았다. 가로로 길게 이은 주황 물결 다음 주자는 짙은 갈색의 우엉채의 등장이었다. 이미 간장에 조려지느라 기운은 좀 빠졌지만 달고 짠 맛을 뽐내며 가로 한 줄을 채웠다. 누가 누가 더 영롱한 빛을 내는지 시합이라도 하듯, 새색시 저고리 색을 뽐내며 달걀 지단채가 다음이었다.
아삭함을 위해 내가 왔노라! 초록 오이와 노랑 단무지가 자리 잡고 나니, 마지막 화룡점정 햄의 등장이었다. 숯불향이 나는 햄은 수북이 쌓인 다른 재료들과 다르게 ‘김은 몇 장? 그럼 나는 김과 같은 개수로 할게’ 하며 새침하게 놓여졌다.
김 어느 한쪽 치우침 없이 펼쳐진 흰 밥 도화지 위에 알록달록 가득 수놓은 재료들은 이제 하나로 합쳐질 차례였다. 가장 아래쪽 밑단을 가장 위쪽 재료 아래로 집어넣는다는 생각으로 단번에 훅 감싸서 말아야 했다. 두 손으로 말면서 어느 한쪽에 더 힘을 줬다가는 김밥 옆구리 터진다. 정성껏 꾹꾹 눌러주고 마지막 제일 윗부분은 물로 쓱 칠하여 단단히 붙여주었다. 오동통한 김밥의 완성이다.
침을 꼴깍거리며 지켜보던 아이들은 한 입만 먹어보자고 아우성이었다.
“잠시만 마저 만들 때까지 기다리렴.”
짧은 대답을 뒤로하고 기계처럼 김밥을 말았다. ‘요즘 김밥 마는 기계가 있어서 김밥 가게에서는 사람이 김밥 말지 않고 기계도 쓴다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한 봉지에 열 장 들어있던 김이 모두 김밥으로 변신했다. 참기름을 스윽 발라 툭툭 썰었다. 칼날에 밥풀이 들러붙지 않도록 물을 살짝 묻혀가며 썰어주었다.
예쁜 접시에 담기 전 아이들의 어여쁜 입속에 하나씩 넣어주었다. 내 입에도 하나 넣었다.
“와-아”
짧은 탄성이 모든 것을 말해주듯 김밥은 언제 먹어도 정말 맛있었다.
피라미드처럼 삼각형으로 쌓아 올린 김밥을 한 줄씩 내려 잘라 접시에 옮겨 담고, 식탁의 각자 자리 앞에 놓았다.
“자-이제 먹어볼까?”
한 개 먹고 또 한 개 먹었다. 무언가 모자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가 빠졌지? 적절한 짠맛과 단맛, 그리고 고소함, 아삭함과 쫄깃함까지 갖췄는데 무엇이 모자라 이런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걸까? 알 수 없는 기분에 김밥 본연의 맛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있던 찰나 아이가 말했다.
“엄마, 김밥에 라면 아니에요?”
아하! 뭔가 부족한 맛이 바로 그거였구나. 얼큰함과 촉촉함을 채워줄 라면이었다.
냄비의 삼 분의 이 정도 물을 채우고 강한 불에 올렸다. 물이 팔팔 끓기 시작하면 수프를 먼저 넣었다. 수프의 매콤함에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아내고 면을 끓는 물 속에 담갔다.
어렸을 적 대가족으로 살았던 나는 할머니가 아침을 챙겨 주셨다. 소풍을 가는 날이면 으레 김밥을 만드셨는데 평소에는 라면을 못 먹게 하지만 김밥이 있는 날은 라면을 주셨다.
왜 그렇게 짝을 지었는지 생각해 보면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이지만, 질길 수도 있는 김에 밥을 가득 넣고 각종 재료를 넣어 푸짐하게 만들었으니 퍽퍽할 수 있었다. 이 퍽퍽함을 그냥 물 한 잔으로 넘겨 버리기에는 김밥을 마는 정성이 아쉽고, 이 슴슴하지만 단 짠한 맛을 더욱 살려줄 촉촉하고도 강렬한 맛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라면은 밀가루 반죽 면을 기름에 한 번 튀겨 만든다. 튀긴 음식은 신발을 튀겨도 맛있을 거란 말이 있듯이 기름옷을 입은 음식은 대부분 맛있다. 그러니 그냥 쌀로 만든 면이나 밀가루 반죽으로만 만든 면보다 얼마나 더 맛있을까? 어른도, 아이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도 좋아하는 맛이다.
어린 시절의 나도 김밥 하나 보다 함께 먹을 수 있는 라면까지가 더 좋았던 것 같다. 내 동생이 자라면서, 소풍 가는 날 도시락을 두 개 준비해야 하면서부터는 대가족의 아침을 바삐 준비하는 할머니는 유부초밥으로 김밥을 대신했고 짝꿍인 라면도 못 먹게 되었다.
면이 익는 동안 면을 한 번씩 잡아 올려 바깥공기를 씌게 해주었다. 그래야 더욱 쫄깃한 라면을 먹을 수 있다. 레시피는 라면 봉지에 쓰여있는 그대로 끓여야 제일 맛있다. 라면이 다 익었다. 그릇에 옮겨 담았다.
김밥 접시 옆에 라면 사발을 놓았다. 환상의 짝꿍이었다. 김밥 한 개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라면을 한 젓가락 집어 후루룩 입속으로 빨아당겼다. 라면 면발에 있던 국물 조금과 김밥의 재료들이 만나 서로의 맛을 더해주며 춤을 추었다.
내 입속의 음식이 덩실덩실 춤을 추면, 내 머릿속 엔도르핀도 덩달아 뿜뿜댔다. 라면과 김밥을 번갈아 먹다 보니 어느덧 접시의 바닥이 보이고 라면 사발에는 국물만 흥건했다. 그리고 배가 불러왔다.
출근하느라 바쁜 평소에는 아이들의 소풍이 있어도 김밥을 싸 주지 못했다. 나도 그 시절 할머니처럼 두 아이에게 유부초밥을 보냈다. 방학에는 여유가 생겨 아이들에게 김밥을 해주곤 한다.
아이들은 엄마의 서툰 솜씨에도 엄지손가락 하나를 치켜올리고, 라면까지 먹으니 양손 엄지를 들어 쌍따봉을 날려주었다.
김밥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준비하는 시간부터 라면을 끓이기까지, 이 순간을 기다렸다. 행복한 배부름에 눈이 스르륵 감겼다. 쌓여있는 설거짓거리를 미뤄두고 소파로 걸어갔다.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살짝 열어놓은 창틈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낮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