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실에세이
첫 전시를 무사히 마친 뒤 취업을 위해 화실을 잠시 떠나 있었다. 이때는 20대 중반인 데 내 인생 암흑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우울한 시기였으며 취업 준비기간은 블랙홀에 빠져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블랙홀에 가까워질수록,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법칙들 따위를 무시하며 시간을 왜곡한다. 블랙홀 안쪽에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의 시간이 평범하게 흐르지만, 바깥세상의 시간은 훨씬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대한 중력에 눌려 천천히 흐른다. 외부인들이 볼 때에도 블랙홀 근처의 시간은 정지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즉 내가 가진 시간은 평범하다고 느꼈지만, 외부인들이 보았을 때에는 내 삶 자체가 멈춰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시간이 넉넉하고, 아직 젊으니까, 여유를 부려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반드시 원하는 기업에 원하는 직무를 맞춰서 들어갈 때까지 취업 준비를 하겠다는 나의 목표는 나이만큼이나 멀리 와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이어왔다.
시작은 전공과 비슷한 IT 개발 쪽으로 취업을 준비하는 시점이었는데 대개 20대들이 그렇듯 자기 적성이 무엇인지 모른 채 아니 알더라도 취업이 조금이라도 잘 되는 직무를 찾기 마련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이 어이없는 말이다.
나도 개발자가 단순히 취업이 잘되고, 과거에 웹 개발 캠프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으니 근거 없는 자신감을 느꼈다. 알바를 병행하며 퇴근할 때는 집에 틀어박혀 프로그램 로직을 새벽까지 짜면서 포트폴리오를 착실히 만들게 된다면 1년 이내에는 취업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나보다 더 뛰어난 취업 준비생들은 차고 넘쳤으며 이들은 기업의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중간에 회사에 합격하기도 하였지만, “내 직무랑 맞지 않아서”, “아 그 회사는 상장사가 아니야.”, “ 집이랑 너무 멀어~”, 등 변명만 주야장천 늘어놨다. 점점 주변에서 한두 명씩 자리를 잡는 것을 보며 큰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래도 끝까지 하면 되겠냐는 가느다란 실만큼이나 희망을 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매진했다.
어느 날 관련 직무의 이력서를 넣고 있었는 데 눈이 침침해지더니 하얀 연기가 점차 색깔을 띠면서 무언가 나에게 속삭이듯 숫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 나이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3년이라는 글씨가 맴돌았고, 뒤늦게 상황을 인지 한순간 그제야 직무를 전환하고자 했다.
급한 마음에 대책 없이 자격증부터 빨리 따자는 생각에 무작정 몇 달 동안 회계를 공부하여 취득했다. 그렇게 화장품 회사의 회계 직무로 합격해서야 비로소 블랙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회사에서는 착실히 직무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들을 흡수했다.
그 후 두 달 뒤 지금의 회사에 입사하여 경영지원팀 (회계 총무)에서 약 4년간 다니고 있다. 물론 내가 준비했던 개발자 쪽은 아니었지만 IT 쪽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잘할 수 있는 데 왜 안 했었던 걸까? 왜 스스로 믿지 못하였을까? 무엇이 나의 발을 묶었을까? 라며 과거의 나를 자책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는 착각 속에 살았었던 것 같다. “아직 20대니까 천천히 해도 돼”라는 거만하고도 겸손하지 못한 태도로 삶에 임했다. 이후 시간의 소중함을 마음속 깊은 곳까지 새겼다.
이 경험은 나의 우주에서 하나의 블랙홀을 발견한 첫 사례이다. 현재에도 내면의 천문학자가 되어 꾸준히 관찰 중이다. 언제 어떻게 빨려 들어갈지 모르니까! 또한 이렇게 힘든 시기에 조금이나마 그림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우울한 감정이 식도 끝까지 올라올 때 드로잉북에 하나둘씩 쌓아 올렸던 낙서들이 폭발하며 응어리들을 씻겨주었다. 거대한 중력으로부터 발산된 멀미를 버티게 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