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심리 에세이>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란 질문을 (마음속으로) 던지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는 '척'하는 사람도 있고, 또한 진정 그러한 사람도 있다. 돌아보면 나 또한 그랬던 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나를 보며, 내가 던진 질문을 곱씹은 사람도 분명 있겠지.
꾸준함은 내게 없는 무엇이었다.
누가 뭐래도 멈추지 않고, 작든 크든 무언가를 계속 해내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타인에 대한 동경은 곧 자신에 대한 결핍을 뜻한다. 내겐 없는 그것을 가진 사람들. 내가 하지 못하는 걸 해내는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더 초라해졌고, 초라해진 나는 타인을 더 크게 우러러보곤 했다.
'악착같음'은 '꾸준함'을 뛰어넘는 말인 것 같다.
꾸준함 이상을 보여야 악착같음이라는 메달을 딸 수 있지 않을까. 시인 김춘수는 하루에 그의 시 단 한 줄을 50번 고쳤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한 그의 악착같음이 없었다면, 김춘수의 <꽃>은 사람들의 뇌리에 오르내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살면서 몇 번은 악착같이 무언가를 해야 할 때가 분명 있다.
다만, 그건 '몇 번'이어야 한다. 삶 내내 악착같을 순 없다. 사람들은 '열정'을 말할 때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떠올리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매일을 열정적으로 살 순 없을뿐더러, 열정은 한번 확 하고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라 장작이나 숯 같이 꾸준히 길고 오래가는 무엇임에 더 가깝다. 각자 열정이 가득했던 때를 돌아보자. 아마도, 주변 누군가는 나의 이기적인 열정에 크게 데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종내에는 스스로를 태워 버렸을지도 모른다. '번아웃'을 경험한 사람이 있다면 십중팔구 그럴 것이다.
고로, 악착같음의 미학은 '항상'이 아닌 '때에 따라' 행하는 데에 있다.
늘 악착같이 못하다고 자책할 필요 없고, 열정의 온도가 천 도 이상이 되지 않는다고 공허해할 필요도 없다.
악착같아야 할 때 악착같이.
그러지 말아야 할 때는 그러하지 않아야 하는 것도 악착같음의 미학에 속한다.
지금 내가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꾸준함을 넘어 악착같이 달려들어야 하는 건 무엇인가.
이미 다 타버린 것 같다면 서두를 필요 없다.
그러나 지금은 또한 다시 불을 붙여야 할 때일 수도 있다.
(삶의) 미학(美學)은 다름 아닌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