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지 않는 사람
가파른 오르막길 끝,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문간마다 신발이 널브러져 있던 연탄불을 피우던 작은 오랜 된 집 1층.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 옆 손바닥만한 작은 부엌과 그 옆엔 작은 파란 사각 타일로 마감된 화장실, 그리고 오롯이 하나뿐인 방 한칸이 그녀가 대여섯살쯤 살 던 집이다. 발끝을 세우면 담 너머 옆집 마당이 보였고, 창틀 위에는 가끔 고양이나 쥐가 올라오곤 했다. 벽지의 습기와 연탄 가루, 빨래 삶는 날의 비누 냄새, 그리고 익어가는 김치냄새가 뒤섞인 특유의 공기를 기억한다.
태풍이 몰아치던 날, 조그만 우산하나 들고 겁도 없이 비디오 가게로 향하던 아이. 날라갈듯한 발끝은 오히려 어린 그녀를 신이나게 하였다. 길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아무렇지 않게 주워들던 어린 손,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씽씽이를 타다 넘어져 무릎이 까진 채 혼자 집으로 돌아와 약을 바르던 어린 그녀.
놀이터라 부르기엔 너무 작고 낡았던, 놀이기구 몇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던 그곳에서 엄마의 지점토 수업이 마치기를 기다리던 날들도 있었고, 연필 끝이 친구의 목을 긁던 날, 급히 달려온 친구의 엄마와 얼굴을 붉히며 다투던 엄마의 모습까지도 이상하게 따뜻하게 떠오른다. 늘 분주하게 하루를 살아내던 그 시절의 가족의 모습이 지금은 흐릿하지만 따스한 사진처럼, 마음 한켠에 남아있다.
하지만 그 많은 기억 속에 유독 단 하나, 아버지의 얼굴은 없다.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그녀는 아무리 기억을 뒤집어봐도 그 시절 아버지의 존재를 마치 잘려나간 필름처럼 텅 비어 있었다. 아버지는 그 시절, 정말 없었던 걸까. 아니면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걸까. 아니면 그녀 마음이 스스로 지워버린 걸까.
먹고 살기 바빴다. 집에 오면 곧바로 눕고, 잠들고, 눈 뜨면 다시 일터로 향해야 했던 고단한 나날들.
돈이 없다는 이유로 형제들에게서도 외면 받는 피로감이 쌓여가던, 간염을 앓고 태풍이 몰아쳐도 갈 길을 잃지 않고 꾸역 꾸역 직장으로 향했던 사람. 그녀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마음속 어딘가에 '애써 구겨 넣은 이해'로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성인이던 어느 날, 아버지 입에서 무심히 흘러나온 한 마디는 그녀가 그토록 외면해오던 기억의 빈틈 위로 단단한 돌덩이처럼 내려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