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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마감 2분 전에 온 환자

by 짧아진 텔로미어

진료마감 2분 전에 온 환자



나는 뒤늦게 의사라는 길로 들어섰다.

그 이유와 짧아진 텔로미어라는 사람이 살아온 삶이 궁금하신 분이 혹시 있으시다면 여기로


[브런치북] 연로하신 인턴 선생님 1부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되던 해에 나는 개인내과의원의 봉직의로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소위 말하는 강호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환자가 꽤 많은 병원이었다.

오전시간에는 위내시경과 복부·갑상선 초음파를 연달아하고

한 시간의 점심식사 겸 휴식 오후에는 외래 진료로 하루를 보낸 시절이었다.

봉직의에게는 환자가 적은 날이 가장 좋은 날이다.

오너가 되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그때의 나는 하루하루가 그저 무난히 흘러가길 바랬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진료 마감까지 2분 남았을 때, 환자가 숨을 고르며 병원으로 들어왔다.

직원과 간호사들은 퇴근이 늦어질까 살짝 표정이 굳어졌을 테고

나 역시 하루의 피로가 누적되어 가는 시간이라 진료 마감 전에 접수된 환자가 달갑지는 않았지만

진료 종료 전에 환자를 돌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서른넷 남자였다.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 둥근 얼굴, 선해 보이는 인상.

속이 몇 달 전부터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마감 시간을 의식한 나머지 신체진찰은 생략한 채 간단한 문진만 하고 2일 치 약을 처방했다.

증상이 지속되면 다시 오라고 말하며.

이틀 뒤 그는 다시 내원했다. 약을 먹고 조금 나아진 듯했지만 여전히 불편하다고 했다.


이번에 그가 내원한 시간은 이른 오후였다. 아마 반차를 내고 온듯했다.

침대에 눕힌 뒤 복부 청진을 하고, 손끝으로 조심스레 복부 진찰을 시작했다.

우상복부에서 간이 갈비뼈 아래로 약 두 마디 정도 만져졌다.

성인에게는 비정상. 간비대가 의심됐다.

원인들을 떠올렸다.

간염, 지방간, 만성 간질환…

문진에서는 별다른 과거병력이 없는 환자였다.


복부 초음파가 필요하겠다는 설명을 했다.

상복부에 초음파 프로브를 대는 순간 화면은 이미 답을 알려주는 듯했다.

간 전체에 퍼진, 다발성 종양을 의심하게 하는 다수의 동그란 병변들


검사 후에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켜고

그리고 차분하게, 최대한 사실 그대로 결과를 설명했다.

상급병원으로의 진료의뢰서를 작성하고 병원진료를 보도록 했다.


그리고는 변함없는 일상으로 잊고 지내던 한 달 후쯤 진료의뢰에 대한 회신서가 도착했다.

그 환자였다. 예상으로는 악성종양 가능성이 높았지만 아니길 바랐는데

"담관암. 수술은 불가하여 항암화학요법 하기로 함"


내게는 그 짧은 문장 안에 너무 많은 감정이 들어있었다.

젊은 환자와 가족이 받았을 충격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듯도 했고

은 사람이 병으로 느닷없이 삶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순간을 보며

문득 오래전, 병으로 젊은 누이 둘을 잃던 장면들이 떠올라 마음이 저릿했다.


그리고 부끄러운 후회가 남았다.

뒤늦게 의사의 길로 들어섰던 이유를 망각하고 처음 내원했을 때

나는 복부 진찰을 하지 않았다. 진료마감 시간이라는 사소한 이유로.


그날 복부진찰을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그 사실이 내 부끄러운 마음을 덜어주지 못했고

퇴근 후 진료마감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바쁘게 서둘러왔을 그에게

고의 진료는 커녕 해야 할 복부 진찰을 하지 못하고 보낸 그 시간이 내내 후회로 남았다.


또한 그날, 기계적으로 설명을 건넸던 내 표정과 목소리도 마음에 걸렸다.

섣부른 기대감을 주는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최소한 좀 더 따뜻한 시선을 담을 수는 있었을 텐데.

그때의 나는 아직 그런 경험치가 부족한 의사였다.


아마 그는 오래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곳과는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바라보며 아프지 않게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 환자 이후로 나는 진료 마감 2분 전이든 1분 전이든

그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바쁘게 하루를 보냈을 한 사람에게 적어도 최선만큼은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최고의 진료는 늘 어려울지라도, 최선의 진료는 마음으로 결정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 다짐은 지금도 변함없이 내 진료의 규칙처럼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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