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뭘 바랄까
1. 모태신앙인 아버지는 결혼 이후에는 평생 신앙생활을 거의 한 교회에서 하셨다. 50년대 말 결혼 직후 영등포구 대방동 ("동작구"는 나중에 생김)에 새로 개척한 교회에 발을 들이신 후 돌아가실 때까지 그 교회에서 평생 신앙생활을 하셨다. 수십 년간 교회에서 처음에는 "권집사"로, 나중에는 "권장로"로 여러 부분에서 봉사를 하셨다. 성가대총무, 교회학교 교사 (나중에는 교회학교 교장으로), 청년부 지도자, 재정부 (헌금, 예결 관리). 교회에서 아버지 손을 거치지 않은 부문은 없는 듯했다. 비슷한 연배의 다른 분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다들 직분을 받고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젊음과 열정을 바치셨다. 그 당시 교회에서는, 다이어리 크기로 교회의 모든 조직과 구성원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교회 요람"이라 불리는 작은 책자를 매해 발간했다.
2. 요람에는 인적사항과 주소등 개인정보까지 수록되어 있었다. 그때는 내 개인 정보가 어떤 책자에 실린 걸 보면 (예를 들어, 전화번호부) 반가워했던 시절이다. 출판, 인쇄계에 종사하셨고, 한때 한국경제 편집부장 경력까지 있었던 아버지였으니, 70년대부터 요람의 편집과 발간을 책임지셨다. 수고가 많이 들어가는 일인데, 그걸 또 매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매해 변경 사항 업데이트나 추가 보충 등, 점점 내용이 풍성해지고 있었다. 각 부서별, 부문별로 취재, 조사, 정리, 편집을 해서 한 해 동안의 교회의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요즘 말로, 웹마스터가 콘텐츠 제작뿐 아니고 지속적인 관리도 잘했다고 보면 되겠다). 어린 시절 나도 틈틈이 도왔는데, 요람이 나올 때의 뿌듯함을 나도 옆에서 느꼈다. 84년 내가 중등부 회장이었는데, 내 이름이 나온 걸 보고 기분이 좋았다. 한편, 아무리 우리가 열심히 이렇게 해도 이걸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것,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다는 것도 느꼈다.
3. 그 당시 성장하고 있던 많은 교회들이 그랬듯, 이 교회 역시 "교회역사"의 발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는 요람 발간을 매년 하시면서 교회의 많은 자료를 갖고 계셨고, 편집, 집필에도 능하셨으므로 자연히 교회 역사편찬의 집필을 맡게 되셨다. 교회가 56년에 시작되었으니, 86년 삼십 년 사 발간을 목표로, 80년대 초반에 시작하셨는데, 책을 쓰고 출판한다는 것은, 요람 발간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라, 많은 난관에 부딪히셨다. 가장 문제는 그 당시 아버지가 직장에서 너무 힘드셨다는 것,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애들은 크고, 돈 들어갈 곳은 많았다. 그때 조그마한 출판사를 다니셨는데 회사에서는 나름 중역(?)—영양가 없는 중역—으로 실적에 대한 엄청난 압력, 그리고 엎친데 덕진 격으로 또 어디 연대보증 잘못 서신 것 때문에 우리 집이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으므로, 삼십 년 사 발간은 답보 상태에 있었다. 90년대 초반에 결국 아버지는 "비자발적 은퇴"를 하셨다. 몇 년간 극단적인 긴축생활을 해왔고 외아들인 막내가 (누구게?) 대학에 간 이후로는 과외를 하면서 돈을 많이 번 덕에 가계빚은 거의 갚았고 그냥저냥 먹고는 살 수 있었지만, 그래도 책임감 때문이신지 경비나 배달 같은 다른 일도 하셨다.
4. 아버지는 이 시기에, 사십 년 사 출간을 목표로, 교회역사 집필을 계속하셨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아래아 한글을 배우셨고 (아들은 참 별로 친절하게 않게 가르쳤다. 계속, 아직 이것도 모르세요? 하면서), 맨날 손으로 하던 편집을 "콤퓨타"로 하면서 매우 신기하고 재미있어하셨다. 드디어 "영동교회 40년 사"가 1996년 발간되었다. 많은 교인들과 목사님은 그동안 아버지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표했다. 나도 옆에서 뿌듯했다. 한편, 이 시점 아버지는 연대보증의 희생자로 몇억의 채무자로서 재정적으로는 이미 소생불능 상태였다. 이때 아버지의 가장 큰 관심사는 보증의 연대책임이 자식들에게 상속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부모님에게는 어떤 재산도 없어서 (주택도 소유하지 않으셨다) 어차피 재산상속은 불가하니 상속포기 절차를 거쳐 자식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하셨다. 그리고는 몇 년 후에 돌아가셨다.
5. 아버지 돌아가신 이듬해 2012년 여름부터 어머니를 미국에서 모시게 되었다. 2014년 세금보고를 하는데, 어머니가 다니셨던 한인 교회의 연간 헌금 납부 기록을 보게 되었다 (어머니가 내 부양가족이므로, 어머니가 내시는 헌금도 내가 내는 헌금과 합산을 하게 된다). 아니, $4500? 어머니가 돈이 따로 없었다는 건 내가 잘 알고 있었고, 매주 헌금을 얼마씩 하시는지도 뻔히 다 아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어머니가 뭔 돈이 있어서 작년에 헌금을 이렇게 하셨어요?"
"그게 말이다…"
내용인 즉, 2000년대 중반, 영동교회에서 아버지가 은퇴하셨을 때 (장로로서 실무적인 일로부터의 은퇴), 교회에서 감사의 뜻으로 아버지께 금 한 덩어리를 증정하였다고 했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어머니의 재산이었다. 어머니는 그걸 고이 갖고 계시다가, 미국에 와서 새로 적을 두게 된 한인 교회에서 헌금으로 바치신 거였다.
"교회에서 받은 건 말이야, 교회로 돌려 드려야 돼. 그래야 하늘에 재산이 쌓이는 거야."
아… 아… 하아, 참.
"아니, 엄마. 이게 돈 몇 푼 문제가 아니고, 허참, 그거 가보 같은 건데,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재산인데, 정말 미치겠네."
"이게 니 꺼니, 아버지 꺼고, 내 건데, 내 맘대로 못하니?"
6. 아버지 돌아가시고 아직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난 아버지의 흔적을 유지 보존하느라 꽤 신경 썼다. 그런 것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갈 때 몹시 아쉽고 슬퍼하고는 했다. 그런데 와중에, 아버지께서 평생 정열을 바쳐서 하셨던 일에 대한 증표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에 대해 아쉬움을 넘어서 분노의 감정까지 생겼다.
"차라리 그 돈을 내가 어머니에게 드리고 어머니가 그 돈으로 헌금하셔도 되는 걸, 이런 건 집에 가보로 두고, 애들한테 너네 할아버지가 이런 일을 하셨다고 가끔 얘기해 줘도 되는데 말이에요..."
"너, 교회 헌금 많이 못하게 하잖아, 십일조도 안 하는 애가 어디서. 헌금은 이렇게 하는 거야. 내 가진 모든 것을 그대로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것"
하아아 악. 참. 이러니, 우린 맨날 이렇게 살았지.
7. 현재 어머니는 한국의 요양병원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고 있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 말씀이 맞았다. 어머니는 현명한 선택을 하셨다. 어머니는 막상 미국에 와 보니 기대하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아들과 한 교회 다니면서 대학교수인 아들 자랑하고 아들의 후광(?) 속에서 여유 있는 노후를 보내고 싶었는데, 이놈은 한인 교회에 다닐 마음이 전혀 안 보였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아마 나도 영동교회에 계속 속해서 봉사하고 신앙생활을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은근히, 집사나 장로 등의 직분을 받고 교회의 여러 곳에서 봉사하고 인정받는 아들을 가진, 원로권사님의 모습을 꿈꾸셨던 것 같다. 현실은 전혀 아니었다. 아들은 한인 사회와 거리를 두고, 영 섞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실망하셨겠지만 내색하지 않으셨다. 이미 포기하셨던 것 같다. 아, 아들에게 기대해서는 안 되겠구나. 그냥 본인 방식대로 여기 교회에서 적응을 해야겠다는 결정을 하신 것 같다. 전 재산 금덩이를 헌금으로 바친 것부터 해서, 여러 교회 일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가끔 제어하지 못하고 아들 자랑을 과하게 할 때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어머니는 다른 교인들로부터 신실한 권사님으로 존경을 받으셨다.
8. 어머니의 기력은 점차 쇠약해져 가면서 예전처럼 활동은 못 하셨고, 교회 일에 참석하면 여럿의 케어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목사님, 사모님,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극진히 어머니를 모셨다. 아들보다 더 잘하셨다. 그분들은 연로한 권사님이 이렇게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게 참 힘이 된다고 했다. 2020년 한국으로 귀국하실 때 사모님께서 특히 많이 아쉬워하셨다. 이후에도 카톡으로 나에게 가끔 안부를 물으시고는 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현명한 결정을 하셨고 일관되게 사셨다. 이 잘난 아들은 그걸 이해 못 하고 구시렁거렸던 거다. 난 부모님께 감사한 게 정말 많다. 부모님은 평생 돈 벌줄 모르고, 있는 척할 줄 모르고, 물려줄 재산도 없지만, 그 마지막 금 한 덩어리마저 자식에게 주지 않았다. 오로지 사랑만 아낌없이 주셨다. 더 이상 뭘 바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