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1세의 콜럼버스 지원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유입
1492년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항구 도시인
제노바(Genova) 출신의 중년 남성인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0-1506)는
동양에 위치한 인도로 가기 위해 대서양이라는
망망대해로 출발하였다.
항해사가 커다란 배를 축조해서 장기간에 걸친,
그것도 목적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배를 끌고 넓디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건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경험 많은 베테랑 항해사이며 그가
아무리 대단한 부를 소유한 재력가일지라도.
그가 인도로 가기 위한 항해를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유럽의 서쪽 끝이자 피레네 산맥(Pyrenees) 이남으로
마치 등껍질 밖으로 머리를 내민 거북이 마냥
떨어져 나온 이베리아(Iberia) 반도에 위치한 어느 왕국의
왕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이베리아 반도의 어느 왕국의
왕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1453년 비잔틴(Byzantine)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잠시 시계를 그로부터 천 년도 더 전으로 되돌려 보자.
유럽에서 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에 이르는
세 개의 대륙에 거대한 영토를 건설한 로마 제국은
시간이 흐르면서 한 명의 황제 아래
효과적으로 통치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제국의 크기가 상당히 넓기도 하였지만
당시 제국의 지도자들이 문제였다.
시대가 지나면서 무능하고 방탕하여
방대한 제국의 통치자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러운
자들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나마 무능력하면 다행이다.
온전한 정신을 가졌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덕성마저도
존재하지 않는 듯 인간 이하의 자질을 가진
인물들이 황제랍시고 제국의
통치자의 자리에 오르기에 이른다.
왕조 국가에서 부적당한 인물이
군주가 되는 것은 국가 전체의 쇠락을
가속시키는 주요 요인이었다.
다행히 제국의 명운은 끝나지 않았다.
혼란의 시대를 겪은 로마 제국은
306년 로마 제국, 아니 서양 역사에서
손꼽히는 훌륭한 군주로 꼽히는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I, 272-337)가
황제에 자리에 오르면서 부흥의 기회를 잡았다.
그는 기독교 세력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음을 깨닫고
이들을 이용하여 제국을 안정시키기로 결심하였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인정하며
중세 기독교 사회 형성의 기틀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330년 에게해(Aegean Sea)와 흑해(Black Sea) 사이에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이 아슬아슬하게 맞닿아 있는
유럽 쪽의 땅을 제국의 수도로 결정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렇게 비잔틴 제국의 초석을 닦았다.
대제의 사후인 395년 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분할되었다.
기존의 로마를 수도로 한 서쪽 지역은 서로마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을 딴 도시를 황도(皇都)로 한
동쪽의 로마는 동로마 혹은 비잔틴 제국이 되었다.
이미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부터 동쪽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기 시작한 제국의 서쪽은
분열 이후에 급격히 쇠퇴하였다.
결국 476년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고,
과거 서로마 제국의 땅에서는 로마 제국이
이룩한 문명이 빠르게 잊혀갔다.
이와 대조적으로, 비잔틴 제국은 로마 제국이 이룩한
문명을 보존하면서 사실상 진공 상태에 놓인 유럽의
서쪽 지역을 대신하여 유럽 문명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후 시대가 흘러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 및
과거 서로마 제국의 땅이 아니었던 지역에서도
안정을 되찾고 기독교가 확산되었다.
서부 및 중부 유럽에 이르는 유럽 대륙의 절반은
과거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터를 잡은
성 베드로(St.Pedro)의 후계자들의 지도하에
가톨릭(Catholic) 신앙지가 되었다. 반면,
비잔틴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세력 하에 있었던
유럽의 동쪽은 세속의 지도자이자 교회의 수장이었던
황제의 지도력 하에 정교회(Oxthodox) 신앙지로
굳건히 자리 잡게 되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있어서는 가톨릭과 정교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Messiah)로 여호와의 아들이라는
공통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 공동체였다.
비잔틴 제국은 교황(Pope)을 주축으로
예루살렘(Jerusalem)의 재탈환을 목적으로 소집된
십자군 원정에서 유럽의 편이 되어 십자군이
아나톨리아(Anatolia) - 혹은 소아시아(Asia Minor) -
땅을 지나가는 데 길을 터주었을 뿐만 아니라,
호시탐탐 세력을 확대하려는 이슬람의 이교도들이
유럽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물질세계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를 입증이라도 하듯,
비잔틴 제국 역시 차침 쇠락해 갔다.
날로 강력해지는 이슬람 세력의 침공으로
조금씩 넓은 영토를 상실해 가던 비잔틴 제국은
결국 1453년 오스만 족에 의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고
천년 왕국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비잔틴 제국의 멸망은 그저 무구한 역사를 지닌
천년 왕국의 멸망이 그치지 않는다.
제국의 영토가 고스란히 기독교 세력에서
전혀 다른 신앙 체계를 가진 이슬람 세계로
넘어간 것이며, 천년 왕국을 멸망시킨 이교도가
유럽으로 언제 진격할지 모르는 위협이 현실화된 것이다.
자신들이 다른 이교도인들에게 그런 것처럼,
이슬람인들 역시 자신들이 믿는 신앙으로 개종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목을 내놓으라고 협박할 것이라는
현실 공포를 마주하였다.
종교, 안보와 생존의 위협도 크지만 이제 동방,
더 정확하게는 인도로 가는 기존의 방법이
사라지게 된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비잔틴 제국이
존재할 때는 비록 중간에 이슬람 세력이 존재하였지만
육로를 통해서 인도로 가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렇지만 또 다른 기독교 국가가 멸망함에 따라
이제 이교도들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땅을 통과해
인도로 들어가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고
엄청난 통행세를 요구하여 실제로 인도로 가는
육상 경로를 차단한 셈이었다.
향신료를 비롯한 인도의 진귀한 것들을 동경하고
갈망하였던 유럽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남았다.
더 이상 동양의 물건을 탐하지 않으며 소비주의를
포기하고 그저 그들의 땅에서 나고 자라고,
생산되는 것들로 자급자족하거나,
동양으로 가는 새로운 방법을 개척하거나.
인간은 늘 물질적인 무언가를 소유하고 소비하려는
욕망의 존재이다. 이미 삶에서 누리던 것들을 포기하고
자신들이 소비하던 것들이 없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핵폭발로 인류 전체가 멸망하여
지구 리셋(reset)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이 자연스러운 욕망에 굴복한 유럽인들은
소비주의를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로 결심한다. 탐욕이 승리한 순간이다.
탐욕이 마냥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욕망은 인간이 무언가를 도전하거나 혁신하려는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대편은 육지가 아닌 끝 모를 바다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좌절하는 대신 바다를 건너
인도로 가기로 결심하였고 그것도 가장 짧은 거리로
인도에 가는 방법을 찾고자 고심하였다.
당시 많은 유럽인들은 이러한 고민에 빠졌고
제노바 출신의 경험 많은 베테랑 항해사는
그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일개 항해사인 자신의 힘만으로는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개척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을 정도로
현실 감각이 훌륭하였다.
그는 교회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는 유럽의 군주들을
알현하여 자신의 계획을 멋지게 설명하였다.
그렇지만 유럽의 군주들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고 이 남자의 도움을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피레네 산맥 이남의, 유럽에 속한 땅이지만,
유럽인들에게는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의
시작이라고 여겨지는 이베리아 반도’
에 위치한 어느 왕국의 군주가 관심을 보였다.
이 군주는 다른 유럽의 왕들과는 달리 이 노련해
보이는 외국인 남성에게 베팅(betting)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배짱 두둑한 군주는 여성이었다.
이사벨이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후에
스페인 역사에서 이사벨이라는 이름을 쓴
최초의 여왕이기에 오늘날에는
이사벨1세(Isabel I, 1451-1504)로 불린다.
그녀가 여왕의 자리에 올랐을 당시에
이베리아 반도에는 에스파냐 혹은 스페인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에 이베리아 반도에는 세 개의 왕국이 존재하였다.
포르투갈 왕국과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ón) 왕국
그리고 아라곤(Aragón) 왕국이 그들이다.
이 셋 중 포르투갈 왕국은 오늘날의 포르투갈로 이어지고,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오늘날의 스페인이다.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 이(y)는 스페인에서 ‘그리고(and)’에 해당하는 접속사이다 –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은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이
통합된 왕국이며, 아라곤 왕국은 발렌시아(Valencia) 왕국과
카탈루냐(Cataluña) 공국(dukedom)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이사벨은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여왕으로
1474년 12월 11일 왕위에 올랐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으로
배를 타고 나간 1492년 아라곤 왕국의 왕은
페르난도2세(Fernando II, 1452-1516)였다.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은 부부 사이였으며
이사벨이 먼저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왕이 되고
후에 1479년 남편 페르난도가 아라곤 왕국의 왕이 되었다.
페르난도가 아라곤의 왕이 되었지만 이사벨은
여전히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군주였으며
각자의 왕국은 각자 통치한다는 원칙을 수립하였다.
또한 둘 중 누가 먼저 사망하더라도 그들이
왕위를 계승하지 않으며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자녀가
후계를 잇는다는 원칙이 성립되었다.
맞벌이하는 부부가 각자 재산은 각자 관리하고
통장을 합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대적인 부부 사이였다.
한 제노바 출신의 중년 남자가 자신이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려는 데에 돈이 필요하니
돈을 대 달라고 왕과 여왕을 찾아왔을 때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는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이사벨은
이 제안을 수락하였다. 이 이탈리아 출신의 남성의
항해에 대한 지원은 남편의 자금줄이 아닌
자신의 통장에서 빼어준 것이다. 여왕이 콜럼버스에게
지원을 해줄 수 있었던 건 그녀가 한 왕국의 군주이며
부부 사이더라도 각자의 왕국은 각자가 통치한다는
원칙이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콜럼버스에 대한 지원은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과 아라곤 왕국에서
동시에 이루어진 거국적인 결정이 아닌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단독 결정이었다.
어째서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제안을 수락하였을까?
1643년에서 1715년까지 무려
72년 동안 프랑스를 통치한 태양왕(le roi soleil)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는 실제로
스페인과 이베리아 반도를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의 시작이라고 표현하였다.
루이14세는 이사벨1세의 지원을 받아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개척하기 위해
배를 출항한 후로부터 무려 150년 후의 인물이다.
이러한 인식이 과연 루이14세 혼자만의 생각이었을까?
아마 17세기 많은 유럽인들도 이 프랑스왕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와 프랑스를 경계 짓는 피레네 산맥은
유럽에서 꽤 험준한 산맥으로서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는 이베리아 반도와 유럽의 나머지 지역의
육상 왕래가 쉽지 않았다. 태생적인 지리적 요인으로
고립되어 있다시피 한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에게
오스만 제국의 발흥으로 동방으로 가는 육로가
막혔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무역까지
예전 같지 않는 악재가 겹치게 되었다.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군주로서 이사벨 여왕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온 이 외국인 남자의 제안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탈리아 반도는 이베리아 반도에게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아라곤 왕국은 전성기 시절에는 이베리아 반도뿐만
아니라 시칠리아(Sicilia), 코르시카(Corsica)와 같은
섬들과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왕국(Napoli)까지
세력권 아래 두었다. 지중해는 마치 아라곤 왕국의
내해(內海)와 같았다. 당연히 이베리아 반도에게
이탈리아는 유럽을 비롯하여 동방과 연결되는
통로와도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중세 시대 동안
아라곤 왕국은 지중해 무역을 통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보다 더
부유하였다. 오늘날에도 스페인 왕국의 제1의 도시이자
정치 중심지는 왕국의 수도인 마드리드(Madrid)이지만
경제 중심지는 제2의 도시인 카탈루냐 자치 정부의
주도인 바르셀로나(Barcelona)이다. 한 때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 지역으로 경제적 번영이
이동한 적도 있었지만 이내 곧 경제적 번영은
전통적인 해상 무역의 중심지인
카탈루냐와 바르셀로나로 되돌아왔다.
그만큼 지중해 연안은 스페인에게 중요한 지역으로서
지리적 약점을 지닌 이베리아 반도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연결될 수 있는 주요 거점지였다.
아라곤 왕국에게 이탈리아는 중요한 존재였고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이 각각
페르난도2세와 이사벨1세의 혼인으로
정치적으로는 하나의 연합왕국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요건이 갖추어진 15세기말,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에게도 이탈리아는
중요하고 비교적 친근한 지역이었다.
인도로 가는 뱃길을 발견하는 데 지원을 해주어
항로를 개척하면 여왕이 통치하는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이 인도와의 해상 무역을
독점할 수 있다는 제안에 이사벨1세는 이 남자가
이탈리아 북부의 항구 도시 제노바 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비교적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에서는 믿을만한 지역이었을 테니.
중세 시대 내내 이탈리아 반도는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역 국가였으며
유럽의 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주요 통로였기 때문에
중세 말 새로운 문화 기운이 이탈리아 중·북부에서
발생하였을 때에도 이베리아 반도는
빠르게 변화의 물결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반도, 더 정확하게는 이탈리아 중·북부에
위치한 피렌체(Firenze), 베네치아(Venezia),
시에나(Sienna), 밀라노(Milano)와 같은 도시에서는
상업이 발달하고 금융 자본주의가 형성되면서
기존의 사회와 다른 시대로 전환되었다. 이들은
교회의 기존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인식하고
재창조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른바 르네상스로
불리는 이러한 변화들은 세계관, 종교,
삶의 방식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에서도 상당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눈에 띄는 변화는 고대 그리스 및 로마에 대한
재발견과 적극적 수용이라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를 포함하였던 비잔틴 제국의 멸망은
서유럽에 상당한 위기 상황이었지만
한쪽에서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비잔틴 제국
시기까지 상당수 남아 있던 고대 그리스어로 저술된
고전들은 제국의 멸망으로 이탈리아로 유입된
비잔틴의 지식인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전해졌다.
중세 기독교의 스콜라(Scholaticism) 철학의
바탕을 이룬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384-B.C.322)의
그리스어 원문뿐만 아니라 그동안 거의 알려진 게 없는
플라톤(Plato, B.C.428-B.C.348)의 사상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그 결과 플라톤 철학에 대한 재해석인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가 발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플라톤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와 전통을 이교도의
야만적인 문화가 아니라 기독교가 성립되기 이전
기독교 사상이 반영된 거울로 해석하는 근거를 제공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는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고
심지어 가톨릭 교황마저도 이교도들의
문화를 노골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러한 일련이 변화에 따라 시각예술 역시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법을 선택하였다.
‘새 술을 새 부대에’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시공간을 초월한 평면과 같은 비현실적인 공간에
평범한 인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마치 인간이 아닌 듯이 표현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기독교의 성인들은
이제 현실성을 얻게 되었다. 예수와 성모를 비롯한
기독교의 성인들은 우리와 같은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살아 숨 쉬는 인간처럼 묘사되기
시작하였으며 성화(聖畫)에 등장하는 배경은
현실 속 공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원근법(perspective), 인체 비례,
인물의 감정에 대한 표현 등 이 시대에 고안된 기법들은
기독교의 미술 전통이 천상의 세계에서
지상의 세계로 내려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미술에 대한 새로운 표현 기법들은
14세기말에서 15세기 초반 먼저 고안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법들은 신플라톤주의를 방패 삼아
고대 그리스·로마의 이교도 문화를 복원하려는
움직임 및 인간의 본질에 대한 기존의 믿음에
의구심을 던지기 시작하고 그 답을 찾으려는
새로운 시대의 소명과 결합하며
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중세 말 지오토(Giotto di Bondone, 1267-1337)부터
시작된 시각예술 부문에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는
시도는 15세기말·16세기 초의 이른바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가들이
등장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 중
가장 연장자인 다빈치는 이미 1480년대에
회화 부문에서 성숙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초반 전 세계적인 열풍을 얻어 영화로까지
제작된 베스트셀러 소설 『다빈치 코드 Da Vinci Code』의
이야기 극초반 여주인공 소피 느뵈(Sophie Neveu)의
할아버지 자크 소니에르(Jacques Saunière)가
루브르박물관(Musée du Louvre)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언급되기도 하였던
<암굴의 성모 Virgin of Rocks>(1483-1486)는
그의 대표작이자 화가로서 다빈치의 명성이
이탈리아 전역을 넘어 유럽 전체로 확대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 작품에서 구현된
성모 마리아와 천사의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는
다빈치의 전매특허가 되었고 동시대 및 후배
화가들에게 여성의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다빈치 및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은
이 시기 미술의 규범으로 인식될 정도로 다빈치와
이 시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이룩한 성과는
이탈리아에 국한되지 않으며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다빈치와 르네상스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성과가
전 유럽으로 확산되며 르네상스 미술 운동이
이탈리아를 넘어 국제양식(international style)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베리아 반도, 더 정확하게는
1500년대 아라곤 왕국 출신의 스페인 미술가들의
역할이 크다. 스페인 미술 전문가인
Jonathan Brown(1939-2022)은 다빈치를 비롯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이 다른 유럽 지역으로
전파되어 국제양식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시작점은
1500년대 아라곤 왕국 출신의 스페인 화가들이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후 이탈리아 중·북부의
최신 미술 경향을 직접 경험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미술 작업을
실시하면서부터라고 밝힌다.
- from Jonathan Brown,
The Golden Age of Painting in Spain (1991) -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오늘날의 위상을 얻는 데
스페인 미술가들이 대단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수입된 이탈리아의 새로운 미술 문화는
이후 스페인 미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다음 세기 스페인이 훌륭한 미술 문화를
이룩하는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다음 글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영향을 받은
당시 스페인 미술가의 작품을 살펴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