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미술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개인적 이유
2007년 1월이었다. 곧 학부 졸업을 앞둔 나는 취업에 실패했다.
미술과 관련한 글쓰기를 하고 싶었지만 세상은 나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별다른 취업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으며 재학 시절,
전공보다 미술대학(college)의 미술사, 미술 이론 전공 수업을
수료하며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데 주력했지만 미술사나 미학,
미술비평 등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도, 그렇다고 미술 실기를
해본 적도 없기에 취업시장에서 나는 경쟁력이 전혀 없는 노동 상품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싸이월드에 올린 전시회 관람글이나 영화 리뷰 같은 게
일종의 포트폴리오가 될 수는 있었지만 하나의 노동 상품으로써
나는 별다른 매력이 없었다.
나는 불안했다. 불안했지만 그 불안을 가족들 앞에서 표출할 수는 없었다.
그저 평소대로 '아몰랑! 어떻게 되겠지.'라는 초연한 척 연기를 해야 했다.
한국의 노동 시장에서 경쟁력이, 매력이 없는 상품으로 스스로를 만들고
그렇게 노동 시장에 나라는 상품을 공급한 건 순순히 내 잘못이기 때문에
누굴 탓하랴. 내가 싸이월드나 어딘가에 써 놓은 전시리뷰를 보고서 마치
대단한 원석인냥 나의 진가를 알아줄 거라고 순진한 눈으로 세상을
호락호락하게 보았던 내 탓이었다. 내 잘못을 인정하기 싫다는 냥
나는 그렇게 초연한 척, 태연한 척해야만 했다.
내면에는 불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 있으며 가족들의 눈을 피해서 나는
공공도서관으로 숨어들었고 그즈음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고 읽어나갔다.
지금은, 아니 그 당시에도 이미 고인이었던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 1892-1978)의 네 권짜리로 구성된
명저 <문학과 예술사> 그중에서도 제2권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끄"를 읽고 있었다.
선사 시대에서 20세기 영화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와 문화/예술을 총망라한 이 기념비적인 책의 전 권은 다 귀중하겠지만
나에게는 제2권이 가장 강렬했다. 15년 정도 흐른 지금 와서 생각해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건 그저 나의 취향이었던 듯.
암흑시대(Dark Age)라는 중세 시대를 지나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의 새로운 문화 운동이
발생하고 잠시 짧은 르네상스의 절정기 - 일명 High Renaissance - 를 맞이한 후
르네상스가 구현한 이상적 아름다움은 급격히 왜곡을 겪었으며 그 이후를
매너리즘(Mannerism) 시대로 부른다.
우리가 일상에서 누군가가 혁신성/창의성 혹은 진지한 고민 없이
반복적/기계적으로 무언가를 되풀이하거나 정체되어 있으면
"매너리즘에 빠졌다"
라는 표현을 하는데 여기에서의 매너리즘은 소문자 m이라면
이러한 경향이 서양의 특정 시기에 문화예술 전반적으로 확대된 현상을
대문자 M을 사용하며 매너리즘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미술사에서 이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는 오늘날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추세이다. 매너리즘이라는 르네상스와 별도의 용어로
이 시기를 지칭하면 그 시기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강조할 수는 있지만 문제는
그 이전 시기와는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시기라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전성기 르네상스(High Renaissance)를 이룩한 거장들에게서도
이미 매너리즘적인 성향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전성기 르네상스와 매너리즘과의
명확한 경계 시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오늘날에는 말기 혹은
'후기 르네상스(Late Renaissance)'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는 추세이다.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이 16세기를 르네상스의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
위치시켜서 이해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르네상스니 매너리즘이니 바로크니, 로코코니, 하는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에 대해서는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티치아노와 같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들은 자신들이 분명 선조들과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는 인식은 있었지만 스스로
"나는 르네상스 인이다!"
라고 명명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르네상스(Renaissance)는 소위
이들 '르네상스 인'들이 세상을 떠난 300년 후에나
이 시대를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1520년대 이후 16세기를 별도의 매너리즘 시대라고 하는 게
이 시대의 독특함을 강조할 수는 있겠지만 긴 호흡으로는 그저
후기 르네랑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고인이 되신 Dr. 하우저는 이 시기를 매너리즘이라고 지칭하셨고
매너리즘을 다룬 그의 책은 나에게 꽤 인상적이었다.
나는 단정하고 질서 정연한 것보다 약간 단정하지 못하고
삐뚤어진 것들을 더욱 선호한다. 그런 나에게 전성기 르네상스는
다소 심심하고 재미없는 그림들로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나는 주목받지 못하는 일명 '아싸'에 대한
약간의 측은지심 같은 게 있다.
매너리즘은 나에게는 그런 느낌이었다.
잘난 우등생 형 때문에 못질이 취급을 받는 동생 같다고 해야 할까?
학부 때 교수님들도 매너리즘은 그저 르네상스의 쇠퇴, 변질,
그만한 재능을 가지지 못한 예술가들의 평범한 재능들
이런 식으로 그 시기를 이야기했고 그저 기괴했다는 논평을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그 기괴함이 더 마음을 끌렸다.
하우저의 책의 매너리즘 파트에 그리스 출신의 스페인 화가
도미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inikos Theotokopoulos), 일명
엘 그레코(El Greco)에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다.
그는 엘 그레코에 대해 꽤 우호적인 입장이었다는 걸 의미한다.
나는 엘 그레코의 다소 기괴한 신체 표현과 마치 부패한 듯한
어딘지 모른 부자연스러운 색채 등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미술사학과를 들어가서 공부를 한다면 이 매너리즘이라는
시대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다짐 같은 게 생겼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울의 모 대학교의 2007년도 1학기
일반대학원 미술사학과의 추가 모집 공고를 2007년 1월에 접하였고
취패자인 나로서는 한 학기를 허비하느니 저 학교에 들어가서
학교에 소속되어 불안한 마음을 다스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반은 미술과 관련한 글쓰기를 하겠다는 미래에 대한 재투자였지만,
반은 도피성 대학원 진학의 성격이 있었다.
원서를 제출했고 얼마 후 연락이 왔다. 면접 구술시험이 있으니
몇 날 며칠 어디로 오라. 그렇게 찾아가서 면접을 보는 데
두 분의 연세가 있으신 장년의 남성 교수님들과
한 분의 30대 후반,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자 교수님,
그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 교수님이 면접관으로 오셨다.
일반적인 면접 방식도 아니었고 학과 사무실에서
소파에 빙 둘러앉아 면접을 봤다. 내 눈에는 그건 일종의 파격이었다.
그중 가장 연세가 많아 보이는 후덕해 보이는 교수님이
"편하게 생각하세요. 구설시험을 본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냥 같이 이야기 나누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면접은 시작되어 '자기소개를 해봐라'라는 cliche에서
'이 학교에 왜 왔냐?' 그런 몇 가지 질문을 하셨던 걸로 기억이 난다.
그중 확실한 건 '입학 후에는 어떠한 걸 공부하고 싶으냐?'라는 질문이었다.
그 학교는 입학지원서만 받았고 학업계획서를 따로 받지 않았었다.
다른 학교에서는 으레껏 받는 학업계획서를 따로 받지 않으니 당시로선 의아했다.
별도의 학업계획서 제출은 없었지만 충분히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라 생각한
나는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통해 엘 그레코와 매너리즘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아서 엘 그레코와 매너리즘이라는 시대에 대해 깊게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소신을 밝혔다. 그러자 가장 연세가 많으신 교수님이
"아~ 마침 잘 됐네요. 여기 계신 이 교수님 박사 전공이 그쪽인데.
한국에서 르네상스 미술 전공자가 미술사학과 교수로 있는 곳이
거의 없는 데 잘 찾아오셨네요."
순간 나는 '아~ 그렇군요!'라고 반응하면 생각 없는 애로 보일까 봐 기지를 발휘하여
"아~ 저도 그래서 특별히 다른 학교가 아니라 이 학교에 진학하고 싶어서 이렇게
추가 모집에 뒤늦게라도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라며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을 씨부렸다. 어쩌겠는가. "몰랐는데요!"라고 하면
떨어질 것 같고 한 번이든 두 번이든 백 번이든 낙방하고 떨어지고 거부당하는 건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거짓을
말해야 했었다.
30대 말,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다소 예민해 보이는 젊은 남자 교수님이
그 교수님이었고. 그분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실 뿐이었다.
민망함일까 겸연쩍음의 웃음일까? 무엇일까?
이유는 이내 밝혀졌다.
"이 젊은 교수님이 이번에 부임하신 지 얼마 안 되셨는데 이렇게
서양 고전미술을 공부하겠다고 찾아온 학생은 처음이라.
아마 첫 제자가 될 것 같네요."
라며 인자한 인상의 교수님이 그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그 젊은 교수님의 웃음은
'이제 나에게도 비록 석사지만 첫 제자가 생기는구나!'라는
그런 기분 좋은 감정의 미소였던 것이다.
그렇게 면접이 진행되었고 며칠이 지나 합격 통보를 받았다.
"축하합니다! 지원자 OOO님은 OOOOO 일반대학원 미술사학과
2007년도 전기 추가 모집 전형에 합격하셨습니다."
라는 내용의 문자를 받았다. 당시로서는 합격을 한 것보다 안도감이 더 컸었다.
이제 나는 취업실패자, 취업낙오자가 아니라 대학원생으로 무언가 할 일이 있는
해야 할 임무가 있고 소속감이 있는 사람이 되었기에 불안 요소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게 2007년도 3월이 되어 신학기가 시작되었고 본격적으로 대학원 석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 구술시험에서 뵈었던 분들은 이제 내가 재학하는 학교의
학과 교수님들이었고 내가 그분들께 가르침을 받아야 할 분들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마치 모든 게 정해졌다시피 그 젊은 남자 교수님의 지도 제자가 되었고,
그 젊은 남자 교수님은 내 지도 교수님인 게 1학기 입학하자마자
비공식적으로 정해졌다. 별 불만은 없었다. 당연히 나는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에
대해 대략적으로 정해서 들어온 것이고 입학하였다고
그 마음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이 지나 2008년이 되었다. 두 학기가 지나 여러 수업들을 이수하였고
큰 틀은 유지되었지만 세부적인 관심은 변하였다. 서양고전 미술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쓰겠다는 건 바뀌지 않았지만 대신 시대가 조금 뒤로 밀려 17세기라는 시대가
나의 미감을 강타하였다. 그렇지만 공간적 배경은 여전하였다. 엘 그레코가 숨을 거둔
그 땅에서 활동한 미술가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을 주제로 선택하겠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렇게 나는 17세기 스페인의 종교미술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작성하였다.
당시로서는 종교가 없었던 내가 종교미술을 선택했다니 의외다. 하지만 르네상스에서
바로크에 이르는 17세기까지 아니 더 길게는 19세기 이전까지 기독교를 피하고서는
서양미술을 이야기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뭐가 되었든 그 기저에는 기독교,
종교라는 키워드가 깔려 있었고 나는 그걸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치자는 생각을 했다.
논문을 쓰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잘한다 잘한다 칭찬을 해줘야 힘을 얻는 사람이다.
지도교수님은 사소한 오류를 지적해 주셨지만 이러한 종교미술품에서 저러한 사회적 맥락을
발견해 낸 나의 시각(perspective)을 적극 응원해 주셨고 그건 학위논문 심사 과정으로도
이어졌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지도교수의 진정한 할 일은 심사 과정에서 최대한
학생의 힘을 실어줘야 하고 학생이 무사 통과할 수 있도록 정치적 활동을 하거나
- 지도교수와 학생의 편에서 함께 쉴드를 쳐 줄 심사위원을 섭외한다던가 -
주눅 들고 부족한 학생을 대신해 한 마디 구원의 말을 해주는 것이라는 걸.
그 당시 나는 2007년 3월에 입학해서 3학기 여름 방학 내내 논문을 써서 4학기가 된
2008년 가을 학기에 논문 심사를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입학 후 4학기 만에 졸업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당연히 인문학에 속한 학과에서는 말이 많았다. 기본 6학기는
깔고 가야 하는데 저 잘난 척하는 하룻강아지가 4학기 만에 졸업을 하겠다고
날뛰는 것이다. 그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1년 동안 학생 신분을
유지하기 위하여 연구등록비를 내야 하는 것도, 나중에 심사비를 따로
내야 하는 것도 경제적으로도 손해였다. 경제적 낭비를 줄이기 위해 전일제로 학교를
다니는 나로서는 추가 비용을 최대한 줄이는 게 나와 부모님이 짊어져야 할
부담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건방진 애가 되었다.
특히 세 명의 심사위원 중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되신 연세가 있으신 교수님이
- 입학 면접시험 때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셨던 교수님 말고 다른 -
문제를 제기하셨다.
첫 번째, 글이 숙성이 안 됐다는 것이다.
몇 십 년 동안 기자와 교수와 연구자로 글을 써오신 분 입장에서 20대 후반의
어린 초짜가 쓴 글이 마음에 안 드셨을 거다.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글이
숙성이 안 됐다는 게 뭐지??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됐지만 나이 40을 넘긴
지금은 대충 어떠한 의도였을지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
두 번째로, 그림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림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 이를테면 그림에서의 붓질이나 표현 방식 등의
형식적(form) 분석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이는 치명적인 한계일
수밖에 없는 게 나와 내 지도교수는 미술 실기를 한 게 아니다 보니 그 부분에
있어서는 시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심사위원장 교수님은
실기를 하셨던 분이고 그분 입장에서는 그런 형식 비평이 없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애정이 없어 보인다는 지적이었다.
세 번째, "직접 여기 있는 그림들 스페인 가서 보고 왔느냐?"였다.
직접 그림도 보고 오지 않고서 무슨 그림에 대한 글을 쓰겠다며
심사위원장 교수님은 반대를 하셨다. 이 부분을 가장 심하게 지적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다 보니, 심사위원 교수님들은 별도의 자리에서
내가 그림을 보고 오고 그 사이에 이거 저거 내용을 수정하며
성의를 보이면,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통과하는 방향으로 가는 걸로.
그러니 지도교수님도
"네가 스페인이라도 다녀와서 직접 그림들을 보고 오는 성의를 보여주렴"
이라 하셨고 곰곰이 생각한 나는 그건 이번 학기든 혹은 다음 학기든 재심사를
볼 때면 그 교수님이 심사위원으로 들어오면 피할 수 없는 지적이 될 것 같아서
수락하기로 했다.
부랴 부랴 2008년 11월 말 나는 스페인행 비행기 표를 알아봤다.
아주 다행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Artmsterdam)을 거쳐
스페인 마드리드(Madrid)로 들어가는 KLM 항공편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찾을 수 있었다. 왕복 90만 원 정도.
일정은 12월 둘째 주에 5박 6일 일정이었고 크리스마스 직전인
12월 22일 정도에 들어오는 일정이었다. 그렇게 난데없는 급 유럽행
여행 준비가 시작되었다. 목적은 오직 하나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Museo Nacional del Prado)에서 내 논문에서 언급한
그림들을 되도록 많이 눈에 마음에 기회가 되면 사진으로 담아 오는 것.
그 외에 다른 미션은 없었고 그게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유럽과 한국은 너무 멀어 유럽을 가는 사람들 중에 특정 한 개 국가만
찍고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들 언제 다시 유럽에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영원의 도시 로마(Rome), 빛의 도시 파리(Paris), 전 세계 금융허브 런던(London),
물의 도시 베네치아(Venice), 21세기 새로운 미술 성지 베를린(Berlin),
제국의 수도이자 음악의 도시 빈(Vienna),
천재 건축가 가우디(Gaudi)의 고향 바르셀로나(Barcelona) 등지를
어떻게든 연결해서 한 번에 방문하려고 하고 그 몇몇 방문지 리스트에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우선순위에서 배제되는 편이다.
아니 적어도 2008년에는 그랬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는 오직 마드리드만을 염두에 두고 2008년 12월
스페인 아니 생애 첫 유럽 여행을 떠났다. 계획대로 나는 마드리드에만 있었고
반나절 마드리드에서 버스를 타고 2시간 정도 떨어진 교외 지역인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을 방문했을 뿐 마드리드가
내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마드리드의 바라하스(Barajas) 국제공항에서 입국하여 수화물을 찾고
빠르게 지하철(metro)을 타고 오페라역(Opera)에서 내려
솔 광장(Plaza del Sol)으로 나온 시간은 밤 11시가 넘었다.
노란색 가로등의 불이 밝혀진 솔 광장은 유럽 특유의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었고
나는 그렇게 내가 살던 대한민국 서울과 완전히 지구 반대편의 한편에
와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처음 눈에 들어오는 유럽 도시의 시각적 충격을
음미할 새도 없이 나는 빠르게 예약한 숙소를 찾아갔고 여차저차해서 여독을 풀었다.
다음 날 아침을 먹는 나는 한국인 게스트하우스의 집을 나왔다.
게스트하우스는 오페라역 그러니까 솔 광장과 왕궁과의 중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나는 왕궁(Palacio Real)을 멀리서 구경하기로 했다. 그날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내가 세상모르고 잠을 자던 사이 12월인 마드리드에 눈이 내렸고 쌓인 눈과
아직은 사람들이 밟지 않은 눈들과 반쯤은 녹아 흙과 뒤섞어 엉망이 된 땅은
그 도시의 첫인상에 좋으면서도 좋지 않은 인상을 주었다.
열정의 나라, 날씨가 더워서 낮 2시에서 5시까지는 낮잠을 자는
독특한 문화(siesta)가 있는 나라의 중심지에서 맞은 첫날에 눈이라니...
마드리드에는 눈이 내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 무지했고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쌓인 눈을 밝으며 왕궁을 구경 갔고 왕궁은 당연히 사전 예약제로 볼 수 있었기에
나는 그저 담장 밖에서 왕궁을 봐야만 했다.
'아~ 여기가 바로 펠리페2세와 그의 자손들인 펠리페3세, 펠리페4세와 카를로스2세가 살았던
알카사르(Alcazar)가 있었던 터에 다시 지어져서 현 스페인 국왕
- 당시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과 소피아 왕비 - 부부와 왕세자 가족이 살고 있는 그 왕궁이구나.'
왕궁의 주변으로는 펠리페2세와 역대 왕들의 조각상들이 눈에 들었다.
왕궁을 보니 내가 정말로 유럽 그것도 아직도 왕이 존재하여 형식적이지만 국가의 수반으로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의 정치 중심지의 그 한가운데 와 있구나라는 게 실감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프라도미술관을 방문하여 프라도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보물들을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천국이었다. 책에서만 봤던 혹은 인터넷을 통해서 왜곡이 된
색상의 이미지로 나에게 그 존재를 보여주었던 그 그림들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뒤러(Albrecht Durer)의 명작이 있으면 그 옆으로는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의
걸작이, 마치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잘생긴 애 옆에 잘생긴 애처럼, 걸작 옆에 또 다른 걸작이
있었다. 도저히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르는 황홀경이었다.
천사의 불화살에 황홀경을 맞봤다는 스페인 아빌라(Avila) 태생의 성녀 테레사(St. Teresa)처럼
나는 예술의 천사가 쏜 불화살을 프라도 미술관에서 맞고 있는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감동이고 놀라움과 경이로움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라도미술관을 세계 탑티어 미술관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 눈에는
프라도미술관은 루브르박물관(Musee du Louvre)나 상트페테르부르크(St.Petersburg)의
에르미타쥬미술관(Hermitage Museum)이나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보다 소장품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다소 낮게 평가하지만 소장품의 면목은 즉, 질적 수준은 이들을 훨씬
능가한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늘날 주요 강대국들로 꼽히는 나라들 아닌가?
국가 박물관의 명성은 국가의 글로벌 파워(global power)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프라도미술관은 전 세계 최고의 박물관/미술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예정대로 5박 6일의 시간을 마드리드에서 보냈다. 체류기간 동안 계속
같은 한인민박에만 머물었는데 중간에 한 모자(母子)가 하룻밤 다른 방에 묶고 갔다.
공동 다이닝룸에서 어쩌다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모자는
로마, 파리, 다른 유럽의 도시들을 들리고, 런던에서 마드리드로
넘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마드리드에 하루만 묶고 다른 도시로 이동할 것이라고 했다.
그때 그 모자의 어머니는 그러셨다.
"마드리드를 1박만 잡은 게 그나마 다행인 것 같아요. 아예 일정에 포함 안 시켰어도 됐을 거고.
파리도 로마를 보고 온 후에는 볼품없어 보이던데 마드리드는 도시도 너무 작고 볼 게 없네요.
그래도 유럽의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깨끗한 편이에요."
라고 평가했다. 당시 서울보다 파리/런던/로마/베를린/비엔나/브뤼셀과 더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었던 나였지만 유럽의 다른 도시들은 여전히 나에게 엄청나게 심리적으로 먼 도시들이었다.
다른 도시들을 들릴 여유도
- 여행 온 밤에도 여행지에서 논문을 수정하여야 하고,
글로벌 금융위기로 1유로가 2000원에 육박하던 시점이라 경제적인 문제로도 -
없었던 나로서는 그 중년부인의 평가에 대해 별 다른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유럽의 도시를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똑같은 도시 속에서 하루 밤 같은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그 도시에 대한, 그리고
그 도시로 대변되는 스페인에 대한 인상은 나와 그 모자와는 완전히 달랐다.
마드리드는 나에게 매우 아름다운 도시였다. 하지만 그 중년 부인과 아들에게는
심심하고 볼 거 없는 재미없는 도시 유럽 여행에서 굳이 시간 내서 돈 들이고
방문할 명분이 딱히 없는 그런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때 나는 느꼈다. 마드리드가,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나에게는
- 물론 나보다 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
특별한 도시이자 나라라는 걸.
그러니 스페인 관련 미술로 미술사 석사 과정에 입학 허가(admission)를 받았고
스페인 미술로 석사 논문을 썼고, 급하게 오직 스페인 그것도 마드리드와
근교의 엘 에스코리알이라는 두 곳만을 목적으로 첫 유럽 여행을 왔으니.
이 짧은 시간 동안 스페인과 마드리드는 내 인생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앞서 썼다시피, 2008년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유로화가 1900원에서 2000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던 시기이다. 비행기 왕복 티켓 값에 숙박비에 현지 경비에 총비용
250만 원 내에서 모든 걸 끝내고자 했다. 당연히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은 어려웠고,
빠예야(paella)나 하몬(jamon)을 곁들인 대표 음식을 먹어 본 적도
투우장에서 투우를 보거나 플라멩코 공연을 보거나, 축구를 관람하기도 어려웠고
심지어 좀 더 멀리 기차를 타고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남부의
세비야(Seville)이나 마드리드 북쪽에 위치한 중세 시대의 수도(capital)
톨레도(Toledo)를 갔다 올 엄두도 못 냈다.
급하게 준비했고 거기다가 미친 유로화 환율 수준에 학생으로만 살다 보니
모아둔 돈도 없었고 그건 우리 부모님의 가계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아쉬운 점이 컸던 여행이었지만 그 여행을 전혀 후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의 석사학위 졸업에 당락을 좌지우지할 열쇠를 쥐고 있었던
심사위원장 교수님의 반 협박이 나중에는 고맙게 느껴졌었다.
아마 그런 반 협박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유럽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거다.
직접 스페인에서 가서 마드리드의 거리 모습, 사람들의 모습, 프라도미술관이 보유한
우수한 걸작들을 직접 보면서 왜 그 교수님이 직접 그림을 봐야 하는지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실제 작품을 마주하였을 때의 그 감정, 감동, 느낌은
아무리 고화질의 이미지나 영상으로 보더라도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예상은 틀렸다.
아니! 오히려 기계복제시대가 되면 될수록 더 진짜 실물의 예술작품을 봐야 하는 이유가
명확해지는 것 같았다. 실제 박물관 혹은 미술관이나 전시실(gallery) 환경에서
어떠한 조명, 어떠한 음악, 어떠한 위치, 그리고 그 전후로 내가 어떠한 심리였는지에 따라
실제 미술 작품에 대한 나의 느낌은 확연히 달라진다.
아무리 좋은 고해상도의 이미지나 영상이라 하더라도 그걸 따라갈 수 없다.
나는 원작의 힘을 강하게 느끼고 왔다.
실제로 작품을 보았을 때 예상만큼 좋았던 작품들도 있었고,
예상보다 감흥이 별하였던 작품들도 있었으며,
별 기대하지 않았는데 나를 집어삼키는 듯한 압도하는 혹은 뭉클해지는 감정을
선사하는 예상 밖의 작품 혹은 미술가들도 있었다.
"이게 바로 원작의 힘이구나."
그리고 나는 다짐했다.
"한국에서 스페인 고전미술의 전문가가 되자.
내가 여기서 받은 이 감정, 이 감동을 사람들에게
그림이라는 매체를 기반으로 말과 글로서 전달하는
중계자(mediator)가 되자."
그런 부품 꿈을 안고 한국에 돌아왔다. 귀국한 후에는 결국 별 이변 없이
2009년 2월 17세기 스페인 종교미술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한국에서의 스페인 미술 전문가가 되겠다는
계획을 실현하고자 스페인 미술 전문 연구자에게 수학하고자
2년을 준비한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지만 부족한 성적으로 유학은 실패하였고
무엇보다 나는 손쉽게 정부 지원을 받을 줄 알았다. 내가 얼마나 순진한 멍청이였는지...
정부 지원을 받을 길은 요원했고 그리고 영어를 원어민 급으로 잘하는 것도 아닌
나를 받아줄, 그것도 - 이제 와서 부끄럽게 고백하건만 - 박사과정 생으로
바로 받아주는 그런 미친 도박을 할만한 학교는 미국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 주제 파악을 못한 나였다. 그렇다고 우리 부모님이 금수저나 다이나몬드 수저였다면
돈을 발라서라도 미국으로 일단 가서 석사부터 다시 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의
수순을 밟았겠지만 우리 집은 그런 환경이 아니었다.
결국 주제 파악을 했고 여차저차해서 미술사의 꿈을 접었고 당연히
'한국에서 스페인 고전미술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당시의 포부와 꿈,
비전 혹은 망상은 패기처분된 지 오래되었다.
그렇게 대략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2012년 나는 정부 산하 국책정책연구기관의
연구보조원 일을 시작하였고 그 이후로 미술사를 지속적으로 공부하는 대신
밥벌이가 가능한 그 무언가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의 전환을 꾀하였으니
2024년 우연한 계기로 유튜브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 이전에 유튜브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지만
올해는 그게 단지 생각에 그치지 않았다. 우선 나는 석사학위를 받았던 논문을
영상 콘텐츠로 제작하는 걸로 첫 영상을 시작하고자 했다.
그런데 MBTI가 J인 나로서는 무언가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나름의 압박을 받았고
아예 스페인 미술을 하나의 시리즈로 제작해서 연속 콘텐츠 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 12월 한국으로 돌아오는 KLM 비행기에서의 나의 다짐, 포부를 돌고 돌아,
시간이 흘러 흘러 2024년 5월에서야 마음 한 구석에서 끄집어냈다.
다만 아쉽게도 유튜브라는 플랫폼은 내가 생각하는 그런 플랫폼도 아니었고
나의 이런 순진한 마음, 달리 말하자면,
콘텐츠 생산/공급자의 입장이 아닌 콘텐츠 소비자/수요자의 입장이 우선되어야 하는
플랫폼이라는 걸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서 깨달았다.
물론 지금 브런치스토리와 같은 에세이 혹은 글쓰기 플랫폼 역시 생산자가
소비자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스페인 미술 콘텐츠를 연속적으로 제공하는 건 오히려
유튜브보다는 이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적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4년 9월 4일 나는 브런치스토리의 작가신청에 응모하여 합격하였다는
이메일 연락을 받았다. 계획서에 나는 미술사, 혹은 그림이야기 콘텐츠로
15세기말에서 19세기 초, 일명 스페인 황금시대(Golden Age of Spain)의
흥망성쇠와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으로 이어지는 약 300년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특정 그림을 선정하여 이야기하는 콘텐츠를 연재하겠다고 밝혔고
그 부분이 좋은 점수를 받은 것 같다. 내가 브런츠스토리라는 플랫폼 호스트에게
이러한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그 약속은 지켜져야 할 것이다.
약속은 어떠한 형태로든 지켜져야 하는 것이니까.
단기적 관점에서는 브런치스토리라는 라이팅(writing) 플랫폼에서 내가
서비스 생산자(service producer) 혹은 공급자(service supplier)로서
참여할 수 있는 허가(permission)를 받은 약속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보다 넓은 관점에서라면, 2008년 12월 당시 누군가의 눈에는
로마, 파리, 런던과 비교하면 볼 품 없는 유럽의 촌스러운 도시로 보였겠지만
나의 눈에는 세상 어느 도시보다도 아름다운 도시로서 이방인이 아닌
꽤 오랜 시간 동안 터를 잡고 그 삶 속에 녹아들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주었던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내가 다짐했던 그 포부를 16년이 지난 지금에서라도
실천할 수 있는 나 자신과의 약속에 대한 실행 혹은 20대의 어린 내가 꾸었던
그 자아를 실현하려는 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08년 12월 예정대로 나는 암스테르담을 거쳐 내 고향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서서히 내 눈에서 멀어지는 마드리드와 스페인의 땅을 하늘 위에서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죽기 전에 다시 스페인에, 마드리드에 그리고 도시 전체가 엄숙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선사하였던 엘 에스코리알에, 그리고 이번에 가보지 못했던 스페인의
다른 도시들을 방문할 날이 올까?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아니야! 난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거야. 돌아갈 거야!'
2024년 9월 나는 스페인에, 마드리드에 다시 돌아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의 마음만큼은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스페인 마드리드 발 여객기 1981 탑승 완료.
"본 여객기의 기장인 한양수다입니다. 본 비행기는 마드리드행 여객기 1981로서
목적지까지 안전한 운행을 약속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한 여행 되시기를
기원하며 이룩하겠습니다.
이륙 10초 전.
10, 9, 8, 7, 6, 5, 4, 3, 2, 1.
비행기가 이륙하였습니다. 목적지까지 안전 운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