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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송 Aug 28. 2024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를 읽고

최근에 수학, 철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는 친동생이 추천해 줘서,

친동생이 다니고 있는 대학의 최성호 교수님이 쓰신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를 읽게 되었다.

책 제목으로부터 책의 주제를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이 책은 인간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탐구적이고, 도전적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결국 인간은 왜 삶을 살아가는가? 와 같은 진리에 가까운 질문들에 대하여 명쾌한 해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철학적 사색을 유도해 주어서 정말 좋았다.

그러한 이유로 책을 읽으면서 드는 의문점이나 생각해 볼 만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에 대한 독후감을 작성해 볼까 한다.


 - 전체적인 내용 정리 -

첫 번째로 교수님은 "인간 삶의 부조리"가 무엇인지를 쉽게 설명해 주셨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삶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럼에도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인간의 부조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 이유에는 지성의 한계와 삶의 유한성이 있다.

인간은 우리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

어떤 연유로 이 세상에 던져졌고, 무엇 때문에 우연적인지 필연적이지도 모르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을 나는 큰 키워드로 "인간 지성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보편적으로 우리 전 인류가 인정할 만한 답을 알고 있다면 우리 인간 삶이 부조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본인의 인생에서 열심히 쌓아온 모든 업적들을 뒤로 한 채,

언젠가는 세상에서 사라지는 존재이다.

이것 또한 부조리함의 근원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부조리"가 무엇인지 설명하신 이후에 철학적으로 동일한 "부조리"라는 개념을 제시하였지만 그 결이 달랐던

알베르 카뮈, 토마스 내 이 글의 주장을 소개해 주신다.

1.

먼저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를 예로 들어 인간 부조리에 대하여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해 주셨다.

신들의 분노를 산 형벌로 영원히 산꼭대기로 무거운 돌을 밀어올려야 하는 이야기는 모두 들어봤을거다.


이 형벌이 진짜 공포스러운 이유는 육체적 고통, 기약 없는 형벌도 아니다.

무거운 돌을 산꼭대기로 밀어올리는 대서 오는 육체적 고통이나,

이 형벌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시간적 요소에서 오는 두려움은 부가적인 요소이다.

카뮈는 이 형벌의 핵심은 "돌을 밀어올리는 행위"가 아무런 목적성이나 의미를 알 수 없기에 고통스럽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인간의 삶과 비교하여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인생의 부조리함이 끝없이 무거운 돌을 밀어올리는 시지프스 신화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영웅적 반항"을 제시한다.

무거운 돌을 굴려 올리다가 그냥 던져버리는, 인생으로 따지면 '자살'하라는 것이 아니다.

신들에 의한 무의미한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가 그 삶을 기꺼이 살아내면서 무의미한 것이 사실 아니라고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의미한 인생을 기꺼이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신들의 오판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2.

그리고 토마스 내 이 글의 부조리에 대한 견해를 소개해 주신다.

이는 우리 자신을 여러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으며, "영원적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장 배고프고, 잠을 자고 싶고 하는 생물학적 신호로부터 오는 우리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도 맞지만,

앞으로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생물학적 욕구를 기꺼이 포기하기도 한다.

이는 네이글의 관점에서 모두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바라볼 때, 1인칭의 관점이다.

네이글의 "영원의 관점"은 다르게 말하면 관찰자적 관점이다.

인생에 있어서 몰두하는 것에 벗어나서 마치 남이 관찰하는 것처럼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면

"나이게 이 모든 것들의 의미란 무엇인가?"라고 자문하게 되는 관점인 것이다.

네이글은 이 두 가지 관점이 충돌할 때 부조리가 생긴다는 견해를 내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철학적 아이러니에 대한 미소로 충분하다는 해답을 제시한다.

영원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것들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조차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우주적 초라함을 애써 외면하며 절대성, 영원성, 보편성을 엄숙하게 추구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어쩌면 한 편의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한탄하거나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저 미소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3.

마지막으로 내가 느꼈을 때는 교수님이 생각이 잘 드러난 반대 신론에 대하여 소개해 주셨다.

반대 신론이란 신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입장으로, 무신론과는 명백하게 구분된다.

초자연적 신이 인간에게 삶의 목적성을 부여해 줌으로써

인간 삶의 정당성, 목적성, 이유를 가지게 되는 상황이 펼쳐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반대 신론의 입장을 고수하시면서 초자연적 신의 모순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다.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의 삶의 목적성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그러나 목적성을 부여한다는  것이 신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게 되고,

과연 절대적인 신이 무엇인가 원한다는 것이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초월적 속성을 결여한 존재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목적과 소명이 과연 우리를 일상적 활동에 대한

정당화의 연쇄가 무한 퇴행으로 빠지는 것을 차단할 수 있는 매듭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해 주셨다.

인간의 삶의 목적성이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들, "근데 왜 이런 목적성을 부여하는데?" 하는 무한 퇴행으로 빠지는 의문점이

제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이 목적과 소명을 부여한 존재라고 가정하더라도,

그러한 삶이 목적성을 알지 못하는 부조리한 삶과 비교했을 때 바람직한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해 주셨다.

마지막으로 신이 인간에게 목적과 소명을 부여하는 것은 신이 자신의 우주적 계획을 위하여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고,

신들이 부여한 목적이 자신에게 왜 중요한지, 그 목적이 자신의 삶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하는지에 대하여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 채

그러한 목적을 부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목적에 헌신하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결론적으로 신의 모순에 대한 이성적 증명과 더불어서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무지 참을 수 없다"와 같은 무신론과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반대 신론의 입장을 취하셨다.

큰 틀에서의 내용 요약은 다음과 같고,

이제부터는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이나 생각해 볼 만한 키워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1-

첫 번째 의문은 "인간은 정말로 초라한 존재인가?"이다.

유한하고, 목적성을 알 수 없는 인생을 사는 인간은 우주적 관점에서는 정말로 초라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정말 작은 미시적 세계나 아니면 다른 차원의 관점에서는

인간과 그 존재를 알 수 없는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인간의 삶을 의미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인간 삶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동의를 했지만 "부조리한 삶이 정말 초라한 삶인가"에 대하여서는

의문이 들었다.

-2-

그리고 읽다 보니 "언어의 한계"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 "A는 의미 있다."라는 문장이 있다.

우리 인간은 언어적 지식의 습득에 있어서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의미'라는 단어에 대하여 인간들끼리 공유 가능할 만큼의 언어적 이해가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은 모두 다르다.

태생부터 모두 다른 DNA를 지니고, 각자 다른 환경에서 언어적 지습을 습득한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말한 '의미'에 대한 의미도 모두 다르게 이해한다.

물론 서로 공유 가능할 만큼의 미묘한 차이를 가지겠지만, 명백하게 다르다.

소총수가 사격 시에 몇 킬로 떨어진 표적을 맞힐 때, 1cm의 오차로도 몇십 미터의 오차가 나는 것처럼

이러한 "언어의 한계"로써 결국은 인간의 언어로 습득한 지식의 목적지가 개인별로 아주 달라져버리는 것이다.

-3-

언어의 한계의 연장선이긴 하지만 "지성의 한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은 지성적 한계를 분명하게 가진다.

만약 "인간은 완벽한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 지성으로부터 파악될 수 없는 것은 없다."라고 가정한다면,

현상, 존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모순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성적 한계를 분명하게 가진다.

그리고 이런 한계가 있는 지성으로 삶의 목적성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그렇기에 '부조리'라고 일단락되어 있는 삶의 아이러니를 결코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지성적 한계와 타협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4-

그리고 다음과 같은 생각들의 최종적인 목적지이기도 하고, 현재 나에게 가장 크나큰 혼돈 상태를 야기하는

"과연 사실이란 무엇인가?,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결국에는 모든 것은 모순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도착한다.

이는 나의 개인적인 특성일 수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연역적인 사고 과정을 띈다.

나의 생각들 중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의심하며, 내 눈앞에 있는 사물조차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는,

그렇기에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으로부터 생각들을 이어나가는 데카르트와도 닮아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데카르트보다 더 의심이 많은 것 같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도 의심스럽다.

이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만약 내 눈앞에 사과가 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실제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VR 장비를 착용한 상태라면 그 사과는 몇십 줄의 코드 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 사과는 존재하는가?

여기서 사고를 조금 더 확장시켜보겠다.

우리의 모든 감각기관이 실제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VR 장비를 착용한 상태라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이 세상은 존재하는가?

조금 더 확장시켜 보겠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조차, 결국은 인간의 한계로 인하여 알지 못하는 고차원적인 존재가 의도한 결과물이라면,

우리의 생각들이, 우리의 삶의 목적성을 찾기 위하여 책을 쓰시며 교수님이 하신 생각들이 의미가 있는가?

그렇기에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모든 것은 모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답이 없는, 그저 무한히 반복되는 질문들인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재미있는 나의 생각을 소개하고 싶다.

이는 우리 '시각'에 관한 생각이다.

우리는 '빨간색'을 보고 모두 동일한 색상을 떠올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까와 같은 사고들의 확장으로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싶다.

"인간은 모두 다르다"에 동의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시각도 모두 다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홍채를 가지고 있고,

모두 다른 홍채를 보유하고 있는 '눈'으로 사물에서 반사된 빛을 걸러서 우리 뇌에 전달하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르기에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빨간색'을 누군가는 '파란색'으로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잘 와닿지 않을 수도 있으니 추가적인 설명을 더 하겠다.

우리는 모두 빨간색을 우리가 생각하는 그 색으로 인식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모두 다른 '시각'이라는 감각기관을 보유한 탓에,

누군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파란색'을 '빨간색'으로 인식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러한 내 관점을 우리 전체의 감각기관, 나아가서 우리 인간의 요소 전체에게 적용시키면 어떤가?

정말로 혼란스럽다.

그러므로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의문이고,

나아가서 모순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목적성, 시지프스가 돌을 굴려서 올라가는 것과 동일하게 부조리한 인생, 네이글의 영원적 관점에서 관찰한 인간의 삶을 통달할 만한 진리와 가깝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순이야말로 완전하다

이 문장 자체도 모순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더욱더 우리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서는, 모든 것을 통달하는 진리가 모순과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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