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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uff Oct 10. 2024

<거룩한 소녀 마리아>

너와 내가 느낄 비극과 제거되야 할 비극의 카타르시즘


다르덴 감독이 <토리와 로키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 있다. 우리가 이 아이들이 처한 환경을 볼 수 있다는 게 축복이라는 인터뷰였다. 


처한 사회와 현실이 부정적으로 느껴질 경우, 더욱이 그 대상이 미래가 기대되고 생생한 사람들일 경우에,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증오하고 경멸하길 바쁘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처한 현실은 비극의 형태가 아니다.


우리가 이러한 드라마를 '공감'으로 치부해서 독자 혹은 청자의 망상으로 이끌어가면 안된다는 생각이다. 그들의 숭고한(숭고하다고 말해야될지는 모르지만) 경험은 우리에게 어떠한 인식의 확장을 요구하는데, 필자가 경험한 '마리아'는 마리아의 기쁨 속에서 확장되었다. 


이 영화의 질문은 다름아니게 "왜 마리아는 기쁨 속에서 잠들었는가?"임에 분명하다. 항상 우리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그녀의 스토리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숭고한 형태의 순교자'가 느끼는 것을 우리도 어떠한 식으로든 느꼈다는 것, 그녀를 압박한 사회와 인간들이 그녀의 기쁨을 초래했다는 것, 결코 그녀에게는 비극의 형태가 아니라 기적의 형태라는 것. 



누구는 이러한 마리아의 삶이 비극이라고 치부하겠지만, 내가 경험한 바는 비극이 아닌 기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잎새를 믿는 불쌍한 인물에게 우리는 가짜 잎새를 수사할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 믿음과 숭배를 통한 수사는 우리가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비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처한 환경을 볼 수 있다는 게 축복이었다.


블레이크의 시와는 다른 아이러니. 


타인을 위해 희생할 용기가 없는 우리에게는 무서운 마리아.


비극은 우리와 당신네들이 아닌, 마리아가 느껴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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