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대의 훌륭한 구조들은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감정 동사들을 격하시키려는 의도는 아니다.
훌륭한 구조라는 것은 필자에게는 사건듩의 중첩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울림 같은 것이다. 필자에게는 작가의 의도나 단일 레이어 따위는 그다지 재미있지 않게 되었다. 결국에는 이런 사건들을 감독이 어떻게 결말로 나아가는지가 중요해지는데,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여행자의 필요는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말- 텍스트의 교환 때문일까? 언제는 말로 들리고 언제는 텍스트로 들린다. 필자가 생각했을 때, 말은 평면이고 진실을 가릴 수 있다. 다만 텍스트는 평면이 아니며 진실이다.
2.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 대해서는 항상 생각이 바뀌지만, 시나리오와 쇼트를 분리해서 생각해 보면 버닝의 메타포들은 감정 동사로 이루어진다.
인물은 무조건 본인의 내적 감정으로 움직인다. 인물이 작가의 구조속에서 이동한다면 인물이 아닌 작가의 세계가 보이기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대체 뭐가 정답일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할 수 있는 목표는 사건들의 레이어를 어떻게 배치시키냐에 달려있다.
일단 필자가 생각했을 때, 현재의 (칸의) 유행은 표면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인물과 사건들을 겹친다. 그렇다고 그것이 다중 레이어로 중첩되어서 심층적인 것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다중 레이어로 겹쳐졌을 때도 깊이가 발생하지 않는 것. 예시로 아노라, 추락의 해부, 존 오브 인터레스트, 페펙트 데이즈 같은 영화들이 필자가 생각하는 것들이다.
반면에 키아로스타미, 허우샤오시엔 같은 감독 영화들을 생각할 수 있다. 인물의 내적 이유를 관객에게 설명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고 생각하는데 필자 같은 일반 관객에겐 지루하다. 샷은 현재 일어나는 일에만 집중하기 때문일까? 홍상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스펜스를 생산한다.
3.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항상 카르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서문이 생각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길 왜 이 인물이 주인공이며 왜 이 인물을 독자들이 봐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필자도 왜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지 연유를 알 것 같다. 알렉세이 카르마조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소설의 주인공에 비해서는 대단한 사상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흥미로운 사건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다만 왜 도스토예프스키가 알료샤를 주인공으로 배치한지 알 것 같다. 나는 그의 지혜와 성장을 보고 싶다.
4.
다시 생각해 보면, 말 - 텍스트의 교환이 핵심인 것 같다. 인물의 내적 진실(말)은 평평해야 하지만, 텍스트는 아니다. 쉽게 이해시키자면 카르마조프가의 이반과 스메쟈르코프는 텍스트를 담당하고, 드미트리와 알료사는 말을 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