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에세이 실패하기. 하지만 에세이를 향하기 위한 노력
필자의 어조는 너무 단정적인데 반해, 말들은 개념화가 되지 못하고 흩어지며 분산된다. 단정적인 어조를 띄우나 산만하다. 왜 산만할까 생각해 봤다. 서로 간의 관계를 나열하고 그 상태를 유예시키려는 것은 존재론적인 방법이지, 절대로 논리적인 산출의 결과는 되지 못한다. 이미 나는 다르게 사고했다. 아니, 나는 사고하지 않았다. 논리적인 정합성이 방향성이라면 사고의 방향성이 잘못된 것이다.
플라톤적인 사고방식은 예시로 기독교적인 가치를 수렴시키는 방향이다. 간단하게 진리를 찾는 것. 성경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정의해라! 사랑. 이것은 플라톤적인 방식이다. 브뤼노 라투르라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사회학자는 이것에 대해서 다르게 말했다. 어떻게 다르게 말했는가?
방금의 얘기로 돌아간다. 어떤 한 철학자이자 신학자가 논문을 썼다.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사랑이다.라고 결론을 냈다. 브뤼노 라투르는 이에 대한 논문을 썼다. 주제는 이렇다. 왜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사랑이다."라고 결론이 났는가? 왜 그렇게 말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의심이 아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을 의심하는 질문이다. 왜 그런 식으로 논문을 썼는지에 대해서 추적하고 반증하는 형식이다.
우리의 사고 방식을 의심하는 것,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철학적 사고이다.
사랑에 대한 플라톤적인 관점이든, 푸코의 관점이든, 프로이트의 관점이든. 라투르가 보기에는 그래 너네의 관점은 알겠다. 이 말이다. 그러나 실천적 분석에는 항상 실패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브뤼노 라투르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성경에서 말하려는 바는 성경에서 나온 모든 텍스트와 논문과 생활방식과 우리의 시대와 태도 등등의 모든 것. 사랑의 네트워크. 그것의 관계 맺음이 곧 성경에서 말하려는 바이다.
이 태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누가 나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이 뭐냐?라고 묻는다면, 모더니즘의 생산 방식을 추적하고 반증하는 것, 결국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쓴 방식 자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자 이제까지 개요를 작성했고,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의 방식이 무엇인지 설명하겠다.
1.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사고하기
21세기 이전의 예술들은 하나의 형식으로 단정 지어서 묶을 수 있다. 닫힌 형식. 예를 들어서 인상주의 - 표현주의라는 시대적 구분은 다르게 말하면 인상주의 - 인상주의 이후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표현주의라고 정의한 것은 '인상주의 이후의 예술'이라는 단어는 열린 언어고 '표현주의'라는 단어는 닫힌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모든 사조는 격동적으로 운동한다. 왜 격동적으로 운동하냐? 미학의 세계가 정치로서 "이게 짱 예술임"이 너무 많은 권력 다툼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다르게 말해 다양성을 확보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움에 대해서 너무 많은 분과가 생겨버렸다. 미국의 50개의 주가 자기가 미국을 대표한다고 난리를 친다. 모더니즘은 새로움이다.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새로움을 형식화하기 위해 매체적 교환이 일어난다. 모더니즘의 핵심은 형식화다. 닫힌 형식으로 만드는 것이 모더니즘의 목표다. 예를 들어서 아프리카의 고유 민족 노래를 빌보드 차트 1위에 세우기 위해 아프리카의 노래가 가진 질료를 새로움으로 현대 유행이 갖고 있는 구조에 편입시킨다. 결론적으로 아프리카의 고유 민족 노래가 되지 못한다. 바뀌어버리고, 이해보다는 쾌락으로, 기존의 것들은 새로움이라는 폭력으로, 전통은 유행으로 퇴행한다. 그래서 우리는 척화비 세웠다. 한국의 민족성이다. 우리의 것들을 보존하면서 세계 유행의 트렌드로 다른 민족들이 찬양하길 바란다. 다만 우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교묘하게 우리의 것들은 퇴행되었다. 자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어떻게 우리의 것들이 교묘하게 변형됐는지 추적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목표다.
어떻게?
닫힌 형식이 아닌 열린 형식으로.
존재한 것들이 사물화 되거나 관념화되어 형식화된 것들을 해체하여 다시 존재하게 만드는 것.
사물의 기능 가치가 교환 가치로 이동하면서 생긴 기능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
그것을 해체하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이동하면서 없어진 것들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하려는 작업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도이다. 한 마디로 닫힌 형식을 열린 형식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2.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의 사유 추적하기.
나는 지금까지 논리적으로 말하기 위해 하나로 개념화하려고 시도했다. 사실 나의 사유 자체가 그것을 거부하기도 하며 배움이 적다. 어떤 개념이나 관념에 대해서 말하기 위한 작업들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장을 수거하지 않고 늘어뜨려 놓는다. 늘어뜨려 놓기 때문에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의미가 생겨난다. 그 의미를 단정 짓지 않고 다음 문장으로 간다. 예를 들어서 A와 B는 논리적으로 아무 상관관계를 갖지 않는다. 다만 A와 B를 연결시킨다. 사실 그다음의 작업은 A와 B를 연결시키고 C라는 결과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내가 내놓은 C는 결과가 아니라 A와 B의 연장이다. 순서 대로 ABCDE... 로 진행한다. 서로의 관계를 간직한 채로.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얽혀있다. A와 B와 C라는 3개의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데, 너무 많은 관계가 포화되었기 때문에 정리되지 못하고 그저 존재한다. 이것은 나의 사유 방식이다. 인풋이 많은 게 장점인데, 아웃풋을 구조화할 수 있는 지능은 갖추지 못했다. 나는 이것을 해명해야 했다. 그렇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닫힌 형식으로 만들지 못해서 열린 형식을 지향했다. 단지 인풋이 많기 때문에, 너무 많은 것들을 다루려 하기 때문에.
3. 그래서 너무 많은 관계망을 끝까지 긍정할 것인가?
아니다. 나는 닫힌 형식으로 만들고 싶다. 그것이 내 모든 글의 목표이다. 다만 정리해야 한다. A와 B의 관계에 대해서 한 문장으로 표현이 가능해야 한다. B와 C가 A와 B가 가진 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명시하고, 또한 한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 최소 단위의 관계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서 진행하면 산만해 보였던 나의 사유들과 글들이 정리되지 않을까?
4. 다만 모든 이유는 열린 형식에서 닫힌 형식으로 운동을 지향하기 위해서.
피카소의 경우 입체파의 형식이 아닌 자신의 형식을 완성시키고는 시시하다고 결론 지어버렸다. 자신의 형식은 피사체가 이동할 뿐이고 자기 복제와 다를 것이 없다. 누구는 "와 왜 이렇게 그렸을까?" 라 하며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본인은 본인이 어떻게 했는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곳에서의 비평은 그런 시시한 그림을 향하지 않고, 그 시시한 그림과 피카소의 일생을 나란히 보기 시작한다. 피카소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시작해야 그곳에서 흥미가 생긴다. 피카소의 뮤즈가 바뀌었다던가, 피카소가 어린 남자애와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던가. 분명히 그림이 바뀌겠지. 필자가 홍상수 박찬욱 이창동 감독에게 기대하는 바는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 그런 시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가장 흥미로운 천재이다. 나는 작품이 아니라 인간을 찬양한다.
결론적으로 필자의 시선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첫 번째로 영토화 - 형식이 닫힌 지점이고,
두 번째로 탈영토화 - 닫힌 형식이 진동하며 움직이려는 시도이고,
세 번째로 재영토화 - 그곳이 열리며 새로이 다시 닫히는 시점이다.
여기까지가 필자가 이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 구조이다.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논리적이지 못했다. 과도한 인풋이 문제였다. 그것을 구조화될 수 있다는 감각은 지니고 있지만 왜 구조화된다고 생각하는지 논리를 제시하지 못했다. 다만 이 글은 어떻게 보일까? 이 글은 정리되어 보일까? 열린 형식의 가능성과 닫힌 형식의 가능성을 동시에 갖췄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