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종소리

by 지구 외계인

저녁 빗자국이 골목에서 마르고 있었다. 간판은 여전히 꺼 둔 채, 문턱의 테이프만 얇게 빛을 모았다. 그물의 매듭에는 굳은 촛농이 작은 별처럼 붙어 있었고, 바닥의 원은 낮에 누가 지나간 손가락 자국을 품은 채 얕게 반짝였다. 병과 돌판은 서로의 그림자를 나누며 한 뼘 거리로 붙어 있었다. 우리는 오늘의 공지를 다시 한 번 읽고, 숨으로 접었다.

“문을… 조금만 더 열까요?” 내가 물었다.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서 낮게, 반쯤만.”

나는 유리문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그때였다. 종이 아주 작게 울렸다. 처음 이 문을 열던 날처럼, 그러나 다른 결로. 한 번 울리고, 반 박자 쉬고, 한 번 더. 그리고 멈춤. 뒤이어 문틈에서 낯선 숨 한 줄이 들어왔다.

그는 우산도, 장갑도 없이 서 있었다. 어깨가 젖지 않았는데도, 어디선가 막 비를 지나온 사람 같은 눈빛이었다. 문턱 앞에서 잠깐 멈추더니, 조심스럽게 발끝을 안으로 옮겼다. 가게 안의 온도가 한 칸 들썩했다.

“저…” 그가 말했다. “제 행운이 좀 고장 난 것 같아서요.”

나는 미소를 얹었다. 첫날의 떨림이 가벼운 여운으로 돌아왔다. “어서 오세요. 먼저, 왜 필요한지 들려주세요.”

그는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유를… 먼저 말씀드리면 되나요?”

“네. 이름은 필요 없습니다. 한 줄이면 충분해요.”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 너무 많은 우연이 저를 지나갔습니다. 잡은 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놓친 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고치고 싶어요. 내일을 잃지 않게.”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접수되었습니다.”

나는 접수병에서 얇은 종이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한 줄로 쓰시고, 점 하나로 끝내세요. 길어지면 숨이 흐트러져요.”

그는 펜을 들고 적었다. 그리고 읽었다. “나는 오늘, 우연을 덜고 내일을 남긴다.”

점.

그 문장이 방의 결에 닿자, 병 벽에 얇은 김이 한 번 맺혔다. 그물의 매듭 하나가 아주 작게 떨리다 멈췄다. 주인장이 수선대를 가리켰다.

“어떤 행운이 고장 났나요?”

그는 어깨를 움츠렸다. “순서요. 늘 먼저 잡으려다 놓칩니다. 남들이 먼저 가면 저는 멀미처럼 흔들려요. 기다리면 늦고, 서두르면 비켜야 하고… 그래서 제 순서가 고작 ‘남은 자리’라는 느낌이 자꾸 듭니다.”

주인장이 미소를 얹었다. “순서는 자리를 만들면 생깁니다. 오늘은 자리를 먼저 고치죠.”

나는 바닥의 원을 가리켰다. “여기—문턱에서 반 바퀴 돌아 들어오세요. 두 번 두드리고, 멈추고.”

그는 유리문을 손끝으로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 멈춤. 그리고 문턱의 테이프 위에서 반 바퀴를 돌아 원 안으로 들어왔다. 모래시계를 뒤집지 않아도, 그의 발끝이 제 박자를 찾는 소리가 났다.

“좋아요.” 내가 말했다. “이제 장치를 ‘당신’으로 맞추겠습니다. 그물의 매듭 하나를 골라 촛농을 아주 조금만 얹어 주세요. 너무 많이 올리면 무거워져요.”

그는 의자에 올라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촛농 한 방울이 매듭에 맺히자, 그늘이 둥글게 부풀었다. 빵 모서리 냄새가 아주 얕게 났다. 주인장이 돌판을 그의 쪽으로 한 뼘 밀었다.

먼저 부름

“이걸 보면서,” 주인장이 낮게 말했다, “당신이 먼저 부르고 싶은 것을 마음속으로 한 번 부르세요. 그리고 입으로는 ‘먼저 듣는다’고 말해 보세요.”

그는 숨을 모았다. “먼저 듣는다.”

그 말이 나오자, 그의 어깨가 절반쯤 내려앉았다. 나는 종을 아주 작게 울렸다. 내 귀에만, 그의 귀에만. 소리는 금세 사라졌고, 사라진 자리의 온기가 그의 발목 쪽으로 내려갔다.

“이제,” 내가 안내했다, “자기 자리를 한 뼘 줄여 보세요.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니라, 비켜서는 겁니다. 앞에서 낮게.”

그는 한 발 옆으로 비켰다. 수선대 위 그림자가 모양을 바꾸었다. 그의 그림자 옆으로, 누군가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좁은 길이 생겼다.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상하네요. 물러난 것도 아닌데… 가벼워졌어요.”

“비켜 선 자리에는 ‘내일’이 들어옵니다.” 주인장이 말했다. “오늘의 우연이 아니라, 내일의 순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 행운은… 덜 갖고, 나누면 되나요?”

나는 벽의 공지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오늘의 행운은 사지 않고 나눕니다.”

그는 그 문장을 소리 내지 않고 따라 읽었다.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그때 문이 살짝 열리고, 반지 이모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늘 모서리, 조금 남았어요. 새 손님 오셨어요?”

“네.” 내가 손짓했다. “새 손님. 순서를 고치러 오셨어요.”

이모가 그의 손에 작은 모서리 조각을 쥐여 주었다. “처음 두 덩이는 나누는 게 규칙입니다.”

그는 머쓱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운동복 학생도 문턱을 두 번 두드리고 들어와 손목끈 한 올을 풀어 그의 손에 얹었다. “떨림 나눔. 벽에 붙이면 덜 흔들립니다.”

버스 운전사는 모자를 벗어 들고 짧게 말했다. “정류장에선 2초 더. 여기선 한 박자 더.”

정장 남자는 손바닥에 적어 둔 문장을 보여 주었다. “질문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방향을 말하세요. ‘나는 오른쪽으로 비켜 서겠습니다’ 같은 방식으로요.”

청소 아주머니는 대걸레를 밖에 세워 두고 손수건을 건넸다. “반짝임이 차갑게 붙으면 미끄러지니, 이걸로 한 번 눌러 주세요.”

그는 연달아 건네지는 것들을 양손에 받다가, 결국 웃으며 말았다.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되나요?”

주인장이 고개를 저었다. “받은 만큼 오늘만 쓰고, 내일은 또 새로 받으면 됩니다. ‘오래 갖기’가 아니라 ‘짧게 따뜻하기’가 여기의 방식이라서요.”

그는 손목끈을 그물의 한 매듭에 가볍게 묶고, 손수건으로 바닥의 원 가장자리를 한번 눌렀다. 모서리 빵은 반으로 나눠 입에 넣었다. 입술이 빵 부스러기의 속도로 움직였다. 그 속도에 맞춰 모래시계의 모래가 조금 더 천천히 흘렀다.

“이제 마지막,” 내가 말했다. “한 줄을 벽에 붙이세요. 오늘만 유효한 당신의 선언. 내일은 내일의 한 줄로 바꾸면 됩니다.”

그는 빈 칸을 찾아 천천히 적었다. “나는 오늘, 먼저 듣고, 내 자리에서 비켜 선다.”

점.

그가 종이를 붙이자, 바로 옆의 오래된 한 줄—‘먼저 부르지 않는다. 대신, 먼저 듣는다’—가 살짝 들렸다가 따라 붙었다. 두 문장이 서로의 모서리를 맞댔다. 굳은 촛농처럼 단단해졌다.

그는 한 발 물러서 벽을 보았다. “이상하네요. 제 문장이… 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맞아요.” 주인장이 웃었다. “여기 벽에 붙는 문장은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갑니다. 무너지지 않고.”

그는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제 행운을—아니, 제 순서를… 고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만 고치면 충분합니다.” 내가 말했다. “내일은 내일 다시 오세요. 이유 한 줄을 들고.”

그는 문턱 앞에서 잠깐 멈췄다. 유리문을 손가락으로 두 번, 가볍게 두드리고 멈추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발걸음이 골목으로 나가며 속도를 잃지 않았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가 멀어지는 사이, 바깥에서 아주 얇은 웃음소리가 한 번, 짧게 났다. 결제음도, 신호등도 아니었지만, 길이 제 박자를 찾는 소리였다.

문이 닫히자, 종이 다시 아주 작게 울렸다. 처음 날과 같은 음색, 그러나 오늘의 온도. 나는 병에 라벨을 접어 넣었다.

오늘의 이유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되, 같은 곳으로 가지 않는다.

주인장이 돌판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글자는 변함없이 밤처럼 선명했다.

먼저 부름

“이 글자를,” 그가 낮게 말했다, “오늘은 이렇게 읽어요. ‘먼저’는 사람의 서열이 아니고, ‘부름’은 소유의 신호가 아니다. 먼저 듣고, 이유를 부르는 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종소리는 작게, 귀에만.”

우리는 종을 또 한 번 아주 작게 울렸다. 내 귀에만, 그의 귀에만, 벽의 한 줄마다 매달려 있는 하루의 귀에만. 그 소리가 병을 지나 그물에 걸렸다가, 바닥의 원에 닿아 살짝 방향을 바꾸고, 문턱의 테이프에 잠깐 붙어 있다가, 유리문을 통과해 골목으로 나갔다.

비가 그친 밤의 냄새가 다시 들어왔다. 우리는 간판을 켜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늘의 종소리가, 첫날과 같은 자리에서 다른 결로 반복되며, 이미 길을 밝혀 주고 있었으니까. 순환은 완성되었다. 그러나 끝은 아니었다. 내일의 한 줄이 이 소리를 이어 받을 것이다. 두 번 두드리고, 멈춤. 그리고 아주 작은 종소리.

화요일 연재
이전 20화19화. 비가 그친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