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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호 소설가

by 안개바다

목련 여인숙 이층 끝방 201호에는 장기 투숙하고 있는 소설가가 있다.

누추한 여인숙이 글쓰기엔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 하나보다. 목련꽃 하나 없는 목련 여인숙의 청승맞은 분위기라면 중편소설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보름에 한번 마누라인 듯 보이는 여자가 옷가지와 몇 푼의 돈을 놓고 가는 것을 여인숙에 상주해 있는 늙은 천사가 목격했다고 한다.

삼류들끼리

오늘 새벽엔 늙은 천사를 가운데 두고 201호와 술을 마셨다. 201호는 침을 튀기며 백석의 시를 찬양했고, 매춘부는 자기도 젊었을 땐 잘 나갔다 했으며, 나는 렘브란트의 빛과 그림자를 말하려다 비어있는 201호의 술잔에 술이나 채웠다.

"비밀 하나 알려줄까?"

201호가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나는 항상 청산가리를 몸에 지니고 있지, 무엇보다 든든한 보험이야. 자유를 찾는 날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여행을 떠날까 해. 그곳이 산토리니 같았으면..."

201호 벽에 붙어있는 산토리니의 커다란 사진.

절벽 위의 하얀 집마다 작은 문패를 달아 놓았다. 명철이네 집, 영숙이네 집, 부겐빌레아 피어있는 엄마네 집.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집 한 채씩 선물했다고 한다. 마지막 집에 내 이름과 늙은 천사도 있다.

"지금 자살을 하겠다는 건가요? 주인 언니가 들으면 당장 방 비우라 하겠네, 죽더라도 우리 여인숙에선 안 돼요."

늙은 천사가 눈을 흘기며 이불을 끌어다 무릎을 덮는다.

201호가 본격적으로 술주정을 한다.

"그대에게 꽃값(花代)을 지불하고 하룻밤 잤으니 그대도 봄꽃입니다."

늙은 천사를 보며 천진스럽게 말한다.

"오늘은 소설가에 화가에 아주 꼴같잖은 예술가들 속에 파묻혀 정신이 없네요.

주름진 눈웃음에 홀짝 소주를 삼킨다.

늙은 천사의 진달래 빛 립스틱이 술잔에 묻어났다.


쓰레기차가 널브러진 밤의 기억을 정화하는 새벽까지 우리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무채색의 하루가 뒤척였고 지하철의 첫차는 숨을 참으며 달리고 있었다.


자유로운 날

옥상 화단의 해바라기 대궁이 굵어질 무렵
존재를 잃어버렸던 삐삐가 오랜만에 몸을 떨었다.

목련 여인숙 201호 소설가의 행방불명.

한 달째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자유를 찾는 날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여행을 가겠다고 했는데 그날이 왔을까. 사라진 그날은 아내와 이혼에 합의한 날이라고 한다.


201호 아내였던 여자가 화실로 찾아와 행방을 묻는다. 마지막으로 법원에 같이 가야 하는 날이라 몸이 달아 있었다.

그는 분명 산토리니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아내였던 여자가 한심하다는 듯 무시하고는 녹슨 철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간다.


태양이 정수리에 멈춘 정오에 잠시 현기증을 느끼며 평상에 누웠다.

초여름 하늘 멀리 비행기가 마침표 하나로 지워질 때까지 시린 눈을 떼지 않았다.

순백으로 표백되는 산토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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