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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웉 Nov 17. 2024

체육대회

11월 13일의 기록

 아침저녁으로는 13도 정도의 서늘한 공기에, 점심에는23도까지 올라가서 더운, 이런 날씨가 될 무렵에 학교에서는 운동회를 하곤 했다. 군대는 초등학교와 비슷한 점이 많은 조직이기에 여기서도 체육대회를 했다. 대회 시작 전 운동장에 모여서 대대장님 말씀을 듣고, 으쌰으쌰 몸을 푸는 모습은 영락없는 초등학교의 체육대회였다. 종목으로는 풋살, 단체줄넘기, 티볼, 계주가 있었다. 우리 중대는 인원이 턱없이 적어서 좋든 싫든 두 팔과 두 다리가 멀쩡한 나는 모든 종목에 참여해야 했다. 나는 다행히 좋은 쪽이었다. 내 발재간으로 풋살 선수로 뛰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내 운동신경은 100명의 사람 중에 뒤에서 20번째 정도 수준이었고 발재간은 더욱 처참했다. 우리 중대의 다른 사람들도 사실 나와 비슷한 처지가 많았고, 우리 중대는 당연하다는 듯이 꼴찌를 했다. 다행인 건 그렇기 때문에 내가 못해서 졌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티볼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1위를 하는 의외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종합 성적은 낮았지만 선수로서 뛰는 과정이 너무나 즐거웠고, 아마 내 표정은 헐떡이는 시간을 제외하면 내내 웃고 있었을 것이다.

 풋살 경기가 끝나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넘어지거나 삐끗한 환자들이 속출하는 것이었다. 풋살이 이렇게 위험한 운동인줄 처음 알았다. 나는 일회용 드레싱 키트, 붕대, 파스, 거즈 등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환자를 처치했다. 의무실로  싹 다 불러서 처치하기엔 환자가 너무 많았다. 사방에서 'medic! medic!' 하면서 나를 부르는 것이 전쟁영화가 따로 없었다. 이런 날 휴가를 쓰고 떠나버리신 군의관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다들 내 노고를 알아주고 고맙다고 말해줘서 뿌듯했다. 내가 이 세상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온 피부로 흡수해서 촉촉해지는 느낌이었다. 점심으로는 천막을 치고 테이블을 세팅한 뒤 대패삼겹살을 구워먹었다. 군대 안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구운 고기지만, 더 희귀한 것은 함께 제공된 맥주였다. 나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두 캔을 마시고 기분이 화학작용에 의해 조금 좋아졌다. 맥주도 맥주지만 음악이 흘러나오고 모두가 하나되는 그 분위기가 좋았다. 봄철의 몽롱한 꽃향기에 취해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길을 걷는 느낌이었다. 내게 꼬리가 있었다면 분명 산책나온 것처럼 흔들고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체육대회가 끝나고서는 산더미같은 뒷정리가 남았는데, 이건 모두 병사들의 몫이었다. 많이 먹어서 무거워진 배와 많이 뛰어서 무거워진 다리를 끌고 뒷정리를 했다. 힘들기도 했지만 숙취처럼 뭔가 불쾌한 느낌이었다. 의무병으로서 한 환자 처치는 보람이라도 있었지, 이건 그런 종류의 일도 아니었다. 나는 그래도 충분히 즐겼으니 거기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며 정리를 했다. 어쩌면 인생 전체가 내가 먹어온 것들과 앞으로 먹을 것들에 대한 대가인 것이다. 나야 모든 종목에 참여하고 점심도 많이 먹었는데 제대로 즐기지 못한 사람들은 뒷정리가 정말 짜증날 것 같았다. 옛날부터 어른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받는 사람의 선호는 전혀 물어보지 않고 주는 사람 마음대로 베풀어놓고서는 그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방학 때면 가끔씩 가족여행을 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갔다와서는 그동안 밀린 공부를 할 것을 요구받았다. 사실 난 여행보다 집에서 핸드폰이나 보면서 뒹굴거리는 게 좋았는데 말이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은 나도 여행이 훨씬 좋긴 하지만 적어도 그 때는 산책 좋아하는 주인을 만나 목줄을 매고 산책을 나가는 불쌍한 금붕어가 되어 어항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그건 어른의 이상함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원하는 사고의 편리함에서 기인하는 문제 같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어른이 된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군대는 특이한 조직이다. 사립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과 그 주위 인물들처럼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도 내가 온 이곳은 그 권력을 가지신 분들이 그렇게 비상식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체육대회를 내가 이정도 즐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저녁이 된 지금 몸은 매우 지쳤지만, 오늘 하루는 분명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가을 끝자락의 파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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