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은주 Nov 26. 2024

얄리를 추억하며

(그림책: 「이럴 수 있는 거야??!」)

   심술궂은 표정의 여자아이가 뒷짐을 지고 등장한다. 어딘가의 입구와 풍경으로 짐작되는 배경 안에 여자아이는 자그맣게 배치되어있지만 빨간색의 원피스와 잔뜩 치켜 올라간 눈썹이 아이의 존재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가만 보니 아이는 뒷짐을 진 게 아니라, 등 뒤로 무언가를 끌고 있다. 아이가 입은 원피스와 같은 색깔의 가방이 딸려오는데, 땅에서 일어나는 흙먼지가 가방의 무게감을 전달한다. 아이는 뭔가의 일로 사뭇 화가 나 있으며, 그 일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얼굴 가득 찌푸린 표정으로 항변하고 있다. 몸집만큼 한 빨간 가방이 이야기의 실마리가 아닐까, 동그란 단추를 비틀어 열면 툭 하고 이야기의 첫머리가 튀어나올 것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여자아이는 기이한 모습이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대며 걸어가는 모습이나, 아이가 들기에는 크기도 디자인도 어울리지 않는 옛날 할머니 것 같은 번쩍이는 빨강 가방이나, 무엇이 들었길래 뒤로 질질 끌어야 하며 그렇게 해서라도 가지고 다녀야 하는 이유 등, 등장만으로 주변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을 끌며 지나가는 아이. 다음 장에서 아이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악을 쓰며 소리친다. “이럴 수 있는 거야??!” 푸른 수목으로 둘러싸인 공원의 잔디밭에서 나른하게 평화로운 한때를 즐기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아이에게로 쏠린다. 순간 그림은 얼어붙은 듯 정지한다. 책을 넘기던 손이, 물을 마시려던 얼굴이, 드러누우려던 몸이 그대로 멈춘 채, 두 눈만이 멀뚱멀뚱 아이의 악쓰는 얼굴을 향한다. 


   가방을 옆에 세워 놓고 아이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친다. 가방을 끌고 다니느라 뒤로 묶였던 두 손이 앞으로 나오면서 불끈 주먹 쥔 손이 된다. 악을 쓰면서 아이의 두 주먹이 파르르 떨린다. 목에 핏대가 선다. 그림에 표현되지 않은 떨림이 아이의 소리치는 표정만으로 머리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영상을 만들어낸다. 아이는 가방을 끌고 장소를 이동하며 익명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있는 힘껏 표현한다. 호수에서 보트를 타며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가족들과 바비큐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아이의 분노 앞에 누구도 이유를 묻지 못한다. 이런 분노는 일상적이지 않으며 터무니없다. 아무도 이 생뚱스러운 분노에 대응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더욱이 분노하는 이가 자그마한 아이인 경우에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밝혀진다. 이야기가 중반을 지나는 시점이다. 용기를 낸 누군가의 “왜 그러니?” 한마디 물음에 아이는 설움의 외침을 쏟아낸다. “엘비스가 죽었어.” 비로소 모든 사건이 명료해진다. 아이의 항변에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있었다.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내내 무거움을 이어가던 그림책이 다음 장에서 잠깐의 유머로 분위기를 전환한다. 모두가 다 아는 유명한, 가수 엘비스의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수 엘비스를 떠올리며 그의 재능을 기억하는 한마디씩을 던지는데 여기서 여자아이가 한 번 더 폭발한다. “가수 엘비스가 아니야!” 그리곤 문제의 몸집만 한 빨간 가방을 열어젖힌다. 동그란 단추가 비틀리며 가방이 활짝 벌려지고 보라색 융의 보드라운 안감 위에 새 한 마리가 누워 있다. “내 엘비스라니까!” 여자아이는 죽은 노란 새를 담은 빨간 가방을 두 손으로 소중히 들어 보인다. 아이의 머리 위로 나뭇잎 그림자가 일렁이고 왼편으로는 아이의 슬픔인 듯 진녹색 그림자가 차분히 곁을 따른다. 아이와 가방과 새가 모두 함께 들어 있는 그림자이다. 노란 새는 어제까지 이렇게 아이와 하나였을 것이다. 




   태어나서 겪는 가장 당혹스러운 경험 중의 하나가 죽음이다. 학습과 경험으로 세상이 이치를 알아간다고 하지만 이해보다는 감정이 앞서고 설득되기보다는 항변하게 된다. 아이들의 세계에 유한한 건 다 써서 그릴 자리가 남지 않은 스케치북이거나 먹어서 없어진 사탕 정도이다. 이 또한 다시 사면 그만이니 아이들의 세계에 유한함이란 애초 있지도 않았다. 생명의 끝과 마주한 아이들은 혼란스럽다. 어제까지 살아 움직이다 오늘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진 건 아니다. 눈앞에 버젓이 있는데 없는 것, 사라진 것과 똑같다고 하니, 아이들은 거짓말이라고 생각된다. 생명체를 스케치북, 사탕처럼 새로 살 수 없으며, 나누었던 교감을 동일하게 느낄 대체 생명체가 있지 않음을 아이들은 애정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깨닫게 된다, 이즈음의 아이들은 기르던 동물의 죽음으로 생명의 유한함을 이전 세대보다 일찍 경험한다. 


   이 그림책은 죽음을 처음 맞이하는 아이가 겪을 수 있는 감정에 대해 다룬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아이는 세상을 향해 악을 쓰는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말이 되느냐고, 도대체 이럴 수 있는 거냐고, 묻고 또 묻는다. 아이의 물음은 작은 새의 죽음에 대한 세상의 논리적인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새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도 이미 깨닫고 있는 중이다. 분신과도 같은 새를, 마치 소중한 동료에 대한 예우인 양 자신의 옷과 똑같은 색깔의 가방에 넣고 다니며, 그것 이상으로 해야 할 무언가를 찾고 있지만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는 애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한 친구가 작은 새를 묻어주자는 제안을 한다. 장례식에 쓰일 소품을 마련하고 새를 묻기에 좋은 곳을 찾아 나선다. 땅을 파고 새를 묻기 전, 아이는 가방을 끌어안고 볼을 비비며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빨간 가방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드는 작은 새.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죽은 새 엘비스를 회상한다. 모두의 마음속에 엘비스의 노래하는 모습이 영화필름처럼 잔잔히 흐르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듯 서로 끌어안고 도닥이며 회자 되었던 기억을 정리한다. 고통을 나누고 망자를 기억하는 동안 슬픔은 반으로 줄어들어, 조금의 눈물만으로도 이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작은 새 엘비스가 먼저 간 가수 엘비스를 만나는 상상으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장례식은 마무리되고, 그림책 마지막 장은 “정말 좋았어요.”로 끝을 맺는다.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가진 아이는 불같이 들끓던 마음이 정제되어 있다. 손을 흔들며 돌아서는 아이의 등 뒤에는 이제 질질 끌면서 해명을 요구해야 할 슬픔이 사라지고 없다. 




   이 그림책의 모든 그림은 액자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진을 액자에 끼워 넣듯 네모반듯한 프레임 안에 그림이 들어가 있으며, 삶의 중요장면을 포착하듯 여자아이의 감정선을 따라 그림이 찍혀 있다. 그림책을 덮고 난 뒤, 되돌아와 다시 처음부터 펼치고 표제지로 들어왔을 때 뜬금없는 새장 그림이 작은 새 엘비스의 부재를 표현한 미장센이었음을 알게 된다. 문이 열린 채 비어있는 새장. 아이가 경험한 첫 죽음의 목도였으리라. 


   많은 사람들의 추억속에 가슴을 저릿하게 하는 슬픔으로 소환되는 유년시절 첫 죽음의 기억이 있다. ‘노란 병아리 얄리’... 성인이 되어서도 얄리를 잊지 못하는 건 여전히... 죽음이 두렵고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대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생각한다. 죽음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던 얄리를 통해 살아있음의 귀중함도 깨닫게 되었다고. 


   쉬이 보낼 수 있는 생명은 없을 것이다. 분노로 망연자실하지 않으면서 잘 이별할 수 있는 방법. 실컷 떠올리면서 슬퍼하는 가운데 잘 떠나보낼 수 있는 방법. 애도의 과정이 필요하다. 아이라고 피해 갈 수 없고, 어른이라고 담담할 수 없다. 무거운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전하는 이 그림책 이야기에 손 내밀어 보기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