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각(總角) : 처녀(處女)
상투를 틀지 않은 남자를 얘기할 거면 비녀를 꽂지 않은 여자를 거론하든가, 처녀(處女)를 얘기할 거면 처남(處男)을 등장시키든가. 지금까지 살펴온 글에서도 봤지만 한국말 지칭은 언밸런스가 트레이드마크였던 거다.
처녀작(處女作)
- 처음으로 지었거나 발표한 작품.[네이버]
- 문학이나 예술 등에서, 처음으로 썼거나 발표한 작품[다음]
처녀림
- 사람이 손을 대지 아니한 자연 그대로의 산림.[네이버]
- 오래전부터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삼림[다음]
[다음] 사전에는 아래와 같은 유의어도 소개되어 있었다. 대체할 수 있는 말이 이렇게 많은데 왜 하필 ‘처녀림’이었을까?
천연림 : 사람의 힘 없이 자연적으로 자라서 이루어진 삼림
자연림 : 사람이 일부러 가꾸지 않은, 그대로의 삼림
원시림 :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
원생림 :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
원림 : 자연에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자신의 생활 공간으로 삼은 것,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
시원림 :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
처녀봉(處女峯)
- 아직 아무도 올라 보지 아니한 산봉우리.[네이버]
- 아직 아무도 올라 보지 아니한 산봉우리.[다음]
처녀비행(處女飛行)
- 새로 만든 비행기를 처음으로 조종하는 비행. 또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조종하는 비행사가 하는 비행.
[네이버]
- 새로 만든 비행기를 처음으로 조종하는 비행. 또는 비행사가 처음으로 하는 비행.[다음]
처녀항해(處女航海)
- 새로 만든 배나 새로 된 항해사가 처음으로 하는 항해.[네이버]
- 새로 만든 배로 처음 하는 항해. 또는 항해사가 되고서 처음으로 하는 항해.[다음]
처녀장가(處女丈家)
- 처녀한테 드는 장가. 주로 재혼하는 남자에 대하여 쓴다.[네이버]
- 주로 재혼하는 남자가 처녀를 아내로 맞은 장가.[다음]
반대말은 총각시집일까?
처녀 출연(處女 出演)
- 네이버, 다음 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다.
- 연극이나 영화에 처음 나가 하는 연기[동아 새국어사전/1995년 2쇄]
처녀 출전(處女 出戰)
- 네이버, 다음 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다.
- 운동 경기나 그 밖의 겨루기, 내기 등에 처음으로 나가 싸움(겨룸).[동아 새국어사전/1995년 2쇄]
처녀 출판(處女 出版)
- 처음으로 하는 출판.[네이버]
- 처음으로 하는 출판.[다음]
이외에도 처녀등정, 처녀우승을 비롯해 더 있겠지만 다 찾아내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여기까지만 하고, 영어 사전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찾아봤다.
virgin
- a person who has never had sex[Oxford]
- someone who has never had sex[Longman]
영영사전에는 분명 person 혹은 someone이라고 해놓았다. '여자'라고는 하지 않았다. 한국어에서는 왜 처녀인가?
영어에 virgin이 들어가는 말은 virgin forest, virgin voyage, virgin land, virgin territory, virgin snow, virgin blade, virgin clay, virgin peak, virgin gold, virgin soil, virgin wool, virgin metal, virgin territory, virgin olive oil 등 많지만, 이 말들은 처녀림, 처녀항해, 처녀설, 처녀봉 등이랑 어감이 다르다. person/someone 대 女다. 어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virgin은 성별이 없다. 남녀 모두에게 쓸 수 있다. 오히려 처녀항해 / 처녀비행 / 처녀 연설이라고 하려면 maiden voyage / maiden flight / maiden speech라고 해야 한다. 그래도 그렇지! 여성은 무슨 죄인가! 한국어에는 virgin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는 거 같다. 내가 못 찾은 거면 좋겠다. virgin은 ‘처녀’가 아니다. 영어 단어를 잘못 이해를 해놓고서는 처녀 시리즈 단어들이 탄생한 게 virgin 때문이라고 탓을 하는 기사까지 등장했다.
한국어에서 굳이 성별을 의식해서 써야겠다면 처녀항해, 처녀비행, 처녀봉, 처녀림 이런 말을 쓸 게 아니라 ‘처남항해(處男航海)’, 처남봉(處男峯), 처남비행(處男飛行), 처남림(處男林)이라고 했어야 한다. 아니면 총각작, 총각림, 총각봉, 총각비행, 총각항해, 총각시집, 총각 출연, 총각 출전, 총각 출판 이렇게 가든가. 만만한 여자들 상대로 처녀 시리즈 만들어 놓고선 비겁하게 남의 나라 말 탓이나 하고 있으니 어느 세월에 진도를 나갈지 답답해 돌아가시겠다.
그냥 '첫', ‘최초’, ‘처음’ 이런 말을 집어넣으면 간단한 걸 왜 굳이 필요도 없는 성별을 끌어다가 말을 망가뜨려놔서 나같이 예민한 사람 혈압 오르게 하는지 모르겠다. 여성을 대상화 하고, 여성의 순결만을 중시하고, 남성에게 속박된 존재로 보는 인식이 아니었다면 이런 말들이 탄생했을까?
나는 ‘처녀림’보다 ‘virgin forest’를 먼저 알았다. 중학교 때였던 거 같다. 선생님이 virgin forest를 설명하면서 처녀림의 뜻을 설명해주셔서 알게 되었다. 그 말이 얼마나 불쾌했던지 당시에도 기분이 나빴던 기억이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선생님 입에서 나온 '아직 정복되지 않은 여자'라는 말을 써서 설명하신 게 잊혀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Cusco의 Virgin Islands라는 음악을 좋아한다. Virgin Islands는 카리브 해에 있는 1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곳인데 14개의 섬에 사람이 거주한다. 동쪽은 1666년부터 영국이 점령(the British Virgin Islands)하고 있고, 서쪽은 1917년부터 미국이 점령(the US Virgin Islands)하고 있다. 좋아하는 음악인데, 학교 때 virgin이라는 말을 처녀라고 배웠던 탓에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좀 불편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영국령, 미국령인데 이런 개념에 ‘처녀’를 집어넣어서 이름을 지었다? 어째 좀 이상했다. 아픈 역사를 가진 땅에 '처녀' 타령하는 건 한가한 작명 놀음 아닌가. 영영사전에 나온 virgin의 뜻으로 이해하고 나서야 그나마 마음 좀 놓고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암컷을 나타내는 '자(雌)'는 새를 나타내는 '추(隹)'와 '따르다', '이르다'를 나타내는 '차(此)'의 뜻이 합쳐져서 '(수컷을)따라가는 새'가 되었다. 수컷을 나타내는 '웅(雄)'은 새를 나타내는 '추'와 '크다', '광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굉'자가 합쳐져서 '굳세다', '용감하다'라는 뜻이 되었다. 수컷은 '굳세고 용감한 존재'고, 암컷은 '굳세고 용감한 수컷을 따라가는 존재'란다. 동물은 자신이 암컷인지 수컷인지조차 관심도 없을 텐데 인간의 삐딱한 가치관을 담아서 동물을 바라보는 건 한자의 오만이다. 인간을 볼 때 여자는 한수 접어놓고 시작하는 시각이 동물을 바라보는 눈높이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