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며 드는 생각 (1)
지난 6월 29일, JYP 소속 남자 아이돌 그룹인 엑스디너리 히어로즈(Xdinary Heroes)의 멤버 준한의 ‘우생학적’ 발언이 논란이 되었다. 팬들이 아티스트와 직접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서비스 플랫폼인 버블에서의 소통 과정 중에 일어난 일이다. DNA의 원하는 부분을 복제하거나 증폭시키는 기술인 유전자 증폭(PCR)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자, 준한은 “인종의 장점을 모아서 … 당 분해 능력이 뛰어난 백인의 능력과 흑인의 신체능력과 두뇌에 능한 황인, 인도인 쪽”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기술이 가능한지 물었다. 이어 “윤리적인 문제가 이슈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지 말고 원하는 사람은 알아서 해라.”라고 언급하였고, 해당 발언이 이루어진 다음 날인 30일에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 자필 사과문을 게재했다. “먼저 저의 경솔한 언급으로 많은 분들에게 큰 상처와 불쾌감을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준한은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더욱 신중을 기하고 책임감을 갖고 행동하겠”다고 다짐하였다.
한편, 온라인 커뮤니티 인스티즈의 한 누리꾼은 준한의 다른 버블 메시지를 담은 글을 해당 사이트에 게시하였다. 이 게시글에 따르면 준한은 “(중략) 선과 악은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냐 안되었냐의 차이가 큰 거 같아... 아마도...?”, “선과 악의 정의라는 게 어렵다는 것이죠 오로지 타인의 시선으로 결정되는 것 같다..”, “쉽게 말해서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게 악이야?”, “사자가 임팔라를 먹는데? 악이야?”, “임팔라 입장에서 악인 거지”, “때리는 것도 내가 맞아서 아픈 게 악이고 누군가가 악이라고 느끼는 것을 악으로 정의하는 기분”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윤리관을 밝히기도 했다. ‘현재 사상 위험하다고 논란인 남돌 다른 메시지.JPG’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게시글에서 누리꾼들은 댓글을 통해 ‘그냥 가만있지 왜 답글을 달아서’, ‘철학자 납셨네’라고 반감을 드러내거나 ‘걍 상상력이 풍부한데 지식이 부족한 듯. 사과도 했는데 계속 비판을 넘은 댓글을 다는 사람들도 적당히 하길... 배워나가면 되지...’라며 그의 사과에 대해 이해하고 수용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반박과 고찰 (1) - 우생학
준한의 철학은 비판받아야 할까? 언뜻 우리의 도덕적 직관과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비판을 시작하는 것은 감정적인 반응을 수반할 수 있다. 그렇게 감정과 함께 출발한 비판은 비난을 낳는다. 그리고 비난은 이내 인신공격과 같은 상처를 만들어 낸다. 상처를 줄 수 있는 생각이라는 이유로 가한 비판이 비판의 대상에게 상처가 된다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준한의 철학이 누군가에게 반감을 일으킨 이유를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준한의 사과는 실제로 그의 진심이 어떠했건 공허한 울림이 될 뿐이다. 또, 준한이 자신의 사과가 닿기를 바랐던(혹은 그렇게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랐던) 사람들이 느꼈을 상처는 개인적이고 사소한 문제로 전락할 뿐이다. 따라서 그의 생각과 그에 따른 반향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것은 준한을 위한 일이며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일이고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준한은 유전자 증폭 기술에 관해 이야기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유전자 증폭이란 DNA의 원하는 부분을 복제하거나 증폭시키는 기술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DNA의 조각, 서열 등을 대상으로 하는 이 기술은 특정 유전자의 탐지나 병의 진단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보건대, 유전자 증폭은 준한의 주장과 같이 어느 인종의 뛰어난 부분을 추출해 다른 인종의 뛰어난 부분과 합치는 ‘프랑켄슈타인 테크놀로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물론 논리적인 제약은 잠시 접어 두고 어떤 기술이 가지는 가능성에 대한 상상을 펼치는 것은 예술가가 가지는 의미 있는 소양일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 증폭에서 ‘우생학적’ 발언으로 도달하는 사고 과정의 분석은 단계적이고 면밀해야 할 것이다. 그 한 번의 도약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급작스럽고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말이다. 그의 결론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위험성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우생학은 위험하다. 인간을 신체적 부분들의 집합으로만 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을 모두 모아도 그것들은 각각의 물질의 집합이지 인간이 아니다. 흩어져 버린 피와 살과 내장은 말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조립은 단순히 분해의 역순이 아니다. 준한은 부분을 통해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 간결함을 느끼고 감동했을지 모른다. 아름답고 자명한 설명은 간결하니까. 하지만 간결하다고 아름답고 자명한 설명은 아니다. 심지어 간결하기만 할 뿐 아름답지도 자명하지도 않은 설명도 있다. 하나의 속성만으로 인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설명은 후자에 속할 것이다. 그저 당 분해 능력이 뛰어난 인종으로 표현되는 것을 기꺼워할 백인이 있을까? 만약 당 분해 능력이 변변찮다면 그 사람은 덜 백인스러운 백인인가? 아니다. 그래서 인간성에 대한 이러한 환원주의적 설명은 아름답지도 않으며 자명하지도 않다. 아름다움은 공감에서, 자명함은 원리에서 기원하니 말이다.
반박과 고찰 (2) - 약육강식
다음으로 준한은 선악의 기준에 대해 이야기한다. 준한은 선과 악을 가르는 주된 기준은 개체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냐 아니냐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사자가 임팔라를 먹는 게 악한 일이라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선악의 구분이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말하는 개체의 입장에서 완성되는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준한은 어떤 개체에게는 생존을 위한 선한 일이 어떤 개체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악한 일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오히려 옳은 말에 가깝다. 개체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냐 아니냐가 선과 악을 구별하는 주된 기준이라면 그렇다. 하지만 생존에 대한 효율성은 선악을 구분짓는 주된 기준이 아니다. 생존에 대한 효율성을 평가하는 일은 개체마다 다르다. 생존에 있어 공통의 특성을 가지는 개체 간에는 평가의 기준을 공유할 수 있다. 그러나 작은 단위로 보자면 그 기준의 오차는 커진다. 오차가 너무 커지면 개념은 불분명해지며 나아가 개념의 존재는 부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선악의 개념을 논리적으로 부정하고 사는가? 아니다. 직관적으로는? 전혀 아니다. 우리는 선악의 개념을 믿으며 실체를 포착하기를 바란다. 선악의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그 개념은 불분명하지 않다. 불분명하지 않은 개념은 오차가 크지 않은 기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차가 큰 기준은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주된 기준으로 내세울 수 없다. 생존에 대한 효율성은 어떤 순간에 선악을 판단하는 좋은 기준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모든 선악을 판가름하는 주된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준한의 윤리관의 핵심 전제는 옳지 않다. 주장의 요지를 구성하는 전제가 옳지 않다면 그에 따른 결론을 판단할 수 는 없다. 그러므로 준한의 윤리관 또한 입증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입증할 수 없는 무언가로 세상을 판단하는 일은 얼마나 위험한가? 필연적으로 공포와 불안을 낳는 잘못된 선택이다. 예를 들어, 히틀러는 유대인의 탐욕이 독일을 망가뜨렸다고 말했다.
약육강식이라는 일편단심의 생존 지향적 선악관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생존할 수 없다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일은 한가로운 몽상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단 살아 있어야 어떤 것이든 가능하니까. 그러나 오로지 생존만을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 오히려 생존에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전쟁터의 군인이 살겠다는 일념으로 싸워서 살아남는 것은 돌아갈 고향을 지키기 위해서이지 단지 살아남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생존을 위한 선악관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선한 일과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악한 일만을 서술하며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가능하다. 생존과 선을 완벽하게 동일한 것으로 전제하므로, 생존 이후의 삶을 논할 때면 또다시 생존과 관련된 관점에서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 안에는 사랑도 없고 희망도 없으며 예술도 없다. 애석하게도 만약 선이 오로지 생존이라면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할 것은 예술이다.
결론: 젊은 예술가의 초상(初喪)
1957년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는 오늘날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역사를 겪는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외톨이가 되어 자신의 예술을 잃게 될 것입니다.(…he cannot put himself today in the service of those who make history; he is at the service of those who suffer it. Otherwise, he will be alone and deprived of his art.)”
오직 글로써 예술을 표현하는 작가만이 카뮈의 예술관에 귀를 기울여야 할까? 만약 작가가 아니어도 그의 예술관에 귀를 기울이기로 결심했다면, 그가 말하고자 했던 예술의 의미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가 겪은 역사는 무엇이며 그에 봉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역사를 겪은 자들에 대한 봉사를 등한시한 예술가가 도달하는 외톨이라는 결과는 어떤 것일까? 고작 두 문장에 불과한 이 짧은 소감에서 우리는 많은 질문을 떠올릴 수 있다. 그에 대한 대답이 어떠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떠오른 질문들에 대한 외면은 우리의 선택지에 있을 수 없다. 호숫가에 떨어진 돌멩이처럼, 보지 않는다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태어나 살아왔고 역사는 흘러갔으며 예술은 계속해서 질문해 왔다. 그리고 예술가는 일어난 일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고 때로 대답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대답에 선행한 것은 그의 물음이었다. 물어야 대답할 수 있다.
준한의 물음은 젊고 예술적이었다. 기술의 발전과 그 속의 인간에 대해 준한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선악의 기준이란 어려운 주제를 앞에 두고 준한은 스스로의 탐구를 도전했다. 하지만 준한의 대답은 어떠했을까? 카뮈의 시선으로 보자면 준한의 대답은 젊지도 예술적이지도 않았다. 준한의 ‘봉사’는 역사를 겪은 사람을 도외시하였고, 준한은 예술을 잃어버린 채 외톨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준한은 반성하고 사과했다. 진심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반성과 사과를 통해 ‘젊은 예술가’는 초상(初喪)을 치렀다. form(플랫폼)이라는 미지의 공간을 통해 예술가로 태어났다는 엑스디너리 히어로즈의 세계관처럼 준한도 이번 장사(葬事)를 계기로 진정 젊은 예술가의 초상(肖像)을 그려내길 바란다. 그 끝은 어떠했을지라도 준한의 시작은 창대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