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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솔 Bin Sole Dec 23. 2024

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그 신화와 구조

4. 배려의 성사

소비사회의 특징은 재화와 서비스의 풍부함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특징은 모든 것이 서비스된다는 것, 즉 소비의 대상이 단순한 제품의 모습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서비스 및 팁 형태로 주어진다는사실이다. "기네스는 당신에게 적합한 맥주다" 라는 선전문구에서부터 안내양의 미소와 담배 자동판매기가 내는 "감사합니다"라는 말, 게다가 국민에 대한 정치가들의 깊은 배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놀랄 정도로 서비스 정신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헌신과 선의의 연합군에 포위되어 있다. 극히 하찮은 화장비누조차도 당신의 피부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전문가 그룹이 수개월간 연구를 거듭한 결과 완성된 제품으로서 우리들 앞에 모습을 나타낸다. 의자회사인 에르보르느사의 선전은 더욱 걸작이다. 자기 회사의 모든 두뇌를 동원하여 당신의 '히프'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는 당신의 히프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회사가 제일 먼저 연구하는 장소입니다… 당신을 의자에 앉히는 것, 그것이 저희 회사의 일입니다. 해부학적으로, 사회적으로, 또 거의 철학적으로 연구를 거듭하였습니다. 당신의 개성을 면밀하게 관찰한 데서 저희 회사의 의자가 생긴 것입니다. ·폴리에스터제 계란형 안락의자는 당신의 섬세한 체형에 더 잘 어울리도록 개발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오게 되면 이것은 더 이상 단순한 의자가 아니라 당신을 위한 완전한 사회보장적 급부이다.

오늘날에는 순수하고 단순하게 소비되는 것, 즉 일정한 목적만을 위해서 구입되고 소유되며 또 이용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당신 주위에 있는 사물은 무엇인가에 쓸모가 있다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우선 당신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개성화된 '당신'이라는 이 직접적인 대상이 없으면, 그리고 개인수당이라는 포괄적 이데올로기가 없으면 소비는 문자 그대로 소비에 불과할 것이다. 소비에 현재와 같은 깊은 의미를 주는 것은 팁과 그것에 의미를 두는 개인적 위안의 따뜻함이지 순수하고 단순한 충족이 아니다. 현대의 소비자들은 이 배려의 양지에서 피부를 태우고 있다.

사회적 이전과 모성적 이전

팁과 배려의 이 체계는 현대사회에서 공적인 제도에 의해 떠받쳐져 있다. 사회적 재분배의 여러 제도(사회보장, 퇴직연금, 각종 수당, 보조금, 보험, 장학금 등)가 그것인데, 페루(F. Perroux)에 의하면 "공권력은 생산적 서비스에 보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사회보장급여를 줌으로써 독점자본의 권력남용을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이전은 겉보기에는 어떠한 보상도 가져다주는 것 같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소위 위험한 계급의 공격성을 감소시킨다." 이러한 재분배의 유효성과 그 경제적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재분배가 작동시키는 사회집단의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원천징수와 경제적 이전 덕분에 사회적 심급(즉, 기존질서)은 자신을 너그럽다고 생각하게 하는 데 성공하며, 도움을 주는 심급의 행세를 한다. 더구나 사회보장, 보험, 어린이와 노인 보호, 실업수당 등 이들 제도에는 모친과 보호자를 생각나게 하는 명칭이 주어지고 있다. 따라서 관청의 '자선'과 '집단적 연대'의 메커니즘 이것들은 모두 '사회의 획득물'이다―이 재분배의 이데올로기적 조작을 통해서 사회통제의 메커니즘으로 기능한다. 마치 잉여가치의 일부가 그 나머지 부분을 확보하기 위해 희생되는 것처럼 모든 일이 행해진다 '은혜'를 가장하면서 사실은 이윤을 숨기는 이 너그러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권력의 전체 체계가 떠받쳐지고 있다. 임금노동자는 전에 빼앗겼던 것의 일부”)를 중여 및 '무상'급여라는 명목으로 받는 것에 대해 매우 만족하기 때문에, 권력으로서는 일석이조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클라크(J. M. Clark)가 '의사(擬似시장사회(pseudo-market-society)'라고 부르는 것이다. 상인 기질에도 불구하고 서양 사회들은 분배를 우선시하고 사회보장입법, 인생의 출발에서 불평등의 시정 등을 통해서 사회의 단결을 보호한다. 이 모든 조치들의 원칙은 돈벌이와는 다른 차원의 연대라는 원칙이다. 그리고 그 수단은 등가교환 원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합리화되는 재분배경제의 법칙에 따르는 이전을 위해 어느 정도의 강제를 적절하게 가하는 것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모든 상품은 단지 산업과정뿐만 아니라 관계, 제도, 이전, 문화 등의 과정들의 교차점이다. 조직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단순히 상품만을 교환하지 않는다. 상품이 교환되는 경우 그들은 상징, 의미작용, 서비스, 정보를 동시에 교환한다. 각각의 상품은 대상을 한정할 수 없는 여러 서비스의 중핵(中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서비스들이 상품에 사회적 성격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라는 페루의 말은 확실히 옳다. 그렇지만 이것은 거꾸로 뒤집어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어떠한 교환도 급부도 '무상(無償)'이 아니라, 가장 욕심이 없어 보이는 교환을 포함해서 모든 교환에 언제나 금전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매매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인데, 상인적 사회는 이 사실을 원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재분배라고 하는 '사회적' 양식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극히 중요하게 되며, 재분배는 사람들의 심리 속에 개인에 대한 '서비스'와 복지에 노력하는 사회질서라는 신화를 심는다. 

미소의 파토스

그렇지만 경제적·정치적 제도들과는 별도로 여기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보다 비공식적 (informel)인, 따라서 제도화되지 않은 사회관계의 전혀 다른 체계이다. 일상적인 소비 속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는 '개인화된 커뮤니케이션의 네트워크가 그것이다. 확실히 여기에서는 소비가 문제이다. 인간관계, 연대, 서로간의 협력, 따뜻함, 특히 서비스 형태로 규격화된 사회적 참가 등이 소비된다. 즉, 배려, 진심, 동정심의 끊임없는 소비가 행해지게 된다. 물론 여기서 소비되는 것은 이 배려의 기호에 불과하지만, 개인간의 사회적 거리와 사회관계의 냉혹함이 객관적인 상례인 체계에서는 이러한 배려는 개인에게 세 끼 식사보다 더 중요하다.

인간관계 (자연발생적, 상호적, 상징적 인간관계)의 상실은 우리 사회의 기본적 특징이다.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인간관계가 기호의 형태로 사회적 회로에 재투입되고, 기호화된 인간관계와 인간적 따뜻함이 소비되는 현상이 생겨나고 있다. 안내양, 사회사업의 여자 가정방문위원, PR 전문가, 선전용 핀업 등 이 모든 공복적(公僕的)인 사도들은 팁, 즉 제도화된 미소를 통한 사회관계의 원활화를 현세(現世)의 사명으로 삼고 있다. 광고가 가깝고도 친밀한 개인적 커뮤케이션의 형태를 모방하고 있는 것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주부에게는

앞집 주부의 말로, 관리직 및 여자 비서에게는 사장이나 동료처럼, 특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친구나 초자아(自我) 또는 참회할 때의 내면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말한다. 따라서 광고는 사람들 사이에, 또 사람과 상품 사이에, 즉 실제로는 친밀함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완전한 시뮬레이션 과정에 따라 친밀함을 만들어낸다. 광고 속에서 특히 (그리고 아마도 맨 먼저) 소비되는 것은 이 친밀함이다.

집단역학 및 그것과 비슷한 연구도 광고의 경우와 똑같은 (정치적)목적이나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것에 속한다. 따라서 정평 있는 사회심리학자가 기업의 불투명한 인간관계에 연대감, 활기, 커뮤니케이션을 재주입하기 위해서 많은 급여를 받고 고용된다. 1

그러므로 3차산업(서비스업)에서 인간관계의 조정 및 마케팅 그리고 판매촉진을 위한 모든 부문(상점주인, 은행원, 여점원, 외무사원, 시장조사원, 판매촉진원 등. 물론 직업상 타인과의 '접촉' '참가' '심리적인 참여'를 행하는 것이 요구되는 사회학자, 취재 방문기자, 흥행업자, 세일즈맨도 잊어서는 안 된다)에는 서로간의 협조 및 따뜻함이라고 하는 내포된 의미가 직무의 계획과 수행에 포함되어 있다. 승진, 취직, 급여 등을 사정할 때 그 내포된 의미를 행하는지 아닌지가 본질적인 조건이 된다. “인간적으로 우수하다" "사교성이 뛰어나다" "동정심이 있다" 등. 따라서 거짓된 자발성, 가면을 쓴 퍼스낼리티의 언설, 계획된 감수성과 인간관계가 도처에서 범람한다. "미소를 잃지 말라!" "친절하라!" "소피텔 리용의 미소, 그것은 본 호텔에 도착하였을 때 당신의 입가에 흐르는 미소입니다. 소피텔 체인의 호텔이 좋다는 것을 안 모든 손님들이 당신과 똑같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미소, 그것은 소피텔의 호텔경영철학입니다."

"작전: 우정의 유리컵・・・・・・ 연극, 영화, 스포츠, 언론계에서 활약하는 유명인들이 사인한 '우정의 유리컵'은 프랑스 의학연구재단에 기부하고 싶어 하는 회사들의 제품에 덧붙여지는 경품입니다...... '우정의 유리컵'에 사인한 사람들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전거 경주자 J. P. 벨트와스, 루이송 보베, 입생 마르탱, 부르빌, 모리스 슈발리에, 베르나르 뷔페, 장 마레, 그리고 탐험가 폴 에밀빅토르."

TWA항공: "손님에게 서비스를 제일 잘하는 본 회사의 종업원에게 총액 백만 달러의 특별수당을 줍니다! 누가 이 행운을 차지할지는 손님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친절한 서비스를 한 TWA의 종업원에게 투표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이 상부구조는 사회적 교환의 기능을 담당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현대의 테크노크라트적 사회의 '철학' 자체이며 가치체계가 되고 있다.

영화 <플레이타임> 또는 서비스의 패러디

배려의 이 거대한 체계는 완전한 모순 위에 성립하고 있다. 이 체계는 상인적 사회의 철칙과 사회적 관계에서의 객관적 사실(도시화 및 산업집중에 따르는 경쟁의 격화와 사회적 거리의 확대), 특히 일상생활 및 가장 개인적인 관계의 내부에서조차 교환가치의 추상화가 일반화된다는 현실을 숨길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 체계 자체가 커뮤니케이션 및 서비스의 인간관계를 생산하는 하나의 생산체계이다. 배려의 체계는 사교성을 생산하지만, 생산체계인 이상 물질적 재화 생산양식의 그것과 똑같은 법칙에 복종해야 하며, 극복하려고 목표로 삼은 사회관계를 자신의 기능 자체에서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배려를 만들어 낼 예정이었던 이 체계가 사회적 거리, 커뮤니케이션 불능의 상태, 인간관계의 불투명성 및 잔학성을 동시에 생산하고 재생산하게 되었다.

이 근본적인 모순은 '기능화된' 인간관계의 모든 영역에서 느낄 수 있다. 이 새로운 사회성, '환하게 빛나는' 배려, 따뜻한 '분위기'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산업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사회적·경제적 진실이 기본적 성격에서조차 드러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도처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왜곡이다: 이 배려의 관료제는 도처에서 공격성 및 빈정거림, 본의 아닌 (블랙) 유머에 의해 왜곡되고 마비되며, 서비스가 행해지는 경우에는 항상 서비스 정신이 욕구불만 및 패러디와 미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배려의 체계가 이러한 모순 때문에 허약하며 언제나 탈이 나고 무너지기 직전에 있다는 것(사실 종종 일어나고 있다)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결국 이것은 소위 '풍요로운' 사회의 심각한 모순 가운데 하나, 즉 본래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봉건적 전통의 '봉사(service)' 개념과 현재 지배적인 민주주의 가치들 사이의 모순이다. 농노 또는 봉건적 내지 전통적인 종은 전적으로 '진심으로' 봉사한다: 《하인에의 훈령》(1745년, 스위프트의 마지막 작품, 미완성) 속에서 이미 예견한 바와 같은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작품에서는 하인들이 주인들의 사회 밖에 완전히 연대적인 자기들만의 사회, 기생적이고 냉소적이며 패러디적이고 빈정대는 사회를 만든다. 이것은 성의 있는 '봉사'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의 풍속 면에서의 붕괴를 의미한다: 이 사회는 형식적으로는 변화하지 않은 가치체계를 가장하면서 강렬한 위선과 일종의 잠재적이며 내색하지 않는 계급투쟁 그리고 주인과 종의 염치없는 상호착취가 행해지는 사태에 도달한다.

민주주의 가치가 지배적이 된 오늘날 '봉사'는 각 사람의 형식적 평등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해결 불가능한 모순이 생긴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적 놀이(JEU)의 일반화이다(오늘날 각 사람은 사생활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직업적 활동에서도 서비스를 받는다거나 타인에게 서비스를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각각은 다소간에 타자를 대상으로 하는 '3차산업에 종사하는 것이다). 관료제사회에서 인간관계의 이 사회적 놀이는 스위프트가 묘사한 바와 같은 하인들의 악랄한 위선과는 다르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서로 돕는 관계의 거대한 '시뮬레이션 모델'로, 더 이상 은폐되지 않는 기능적 위장이다. 필수불가결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마저도 개개의 사람이 연루되어 있는 이 인간관계의 '강제(forcing)'를 대가로 해서만 달성된다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적의(敵)와 거리의 객관적 관계를 진정시키기 위한 멋진 겉치레이다.

우리의 '봉사'의 세계는 아직도 상당히 스위프트적인 세계다. 공무원의 퉁명스러움과 공격적인 태도는 스위프트적 발상에 기인하는 고풍적인 태도이며, 부인들을 상대하는 남자미용사의 알랑거림과 세일즈맨의 확고하고도 거리낌 없는 끈질긴 부탁은 모두 봉사의 폭력적. 강제적·희화적 형태이다. 즉, 스위프트의 주인과 하인 사이에서처럼 인격적 관계의 소외된 형태가 뻔히 드러나보이는 알랑거림의 수사이다. 은행원, 호텔보이, 우체국의 여사무원 등이 손님에게 쌀쌀맞게 대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공손한 태도를 통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급료 때문에 봉사한다는 것을 손님에게 느끼게 하는데, 사실은 이태도야말로 그들의 인간성 및 인격의 표현이며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거칠고 불손한 또는 모르는 체하는 태도를 나타낸다든가 고의로 일의 속도를 늦추거나 노골적으로 공격적이 되는 것, 아니면 반대로 지나칠 정도로 정중하게 대해주는 것은 단지 돈 때문에 하고 있었을 뿐인 판에 박힌 헌신을 마치 자연스럽게 나타내야 한다는 모순에 대한 그들의 저항이다. 모호하게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덤벼들지 모르는 그 '봉사'교환의 메스꺼운 분위기는 여기서 생긴다. 여기에서는 살아 있는 인간이 교환의 기능적 '개성화(personnalisation)' (가면을 쓴 퍼스낼리티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옛날의 잔재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진짜 기능적인 관계가 사람들 사이에 일체의 긴장을 없애버렸다. '기능적'서비스의 관계는 더 이상 폭력적, 위선적이지도, 사도마조히즘적(sado-masochiste) 이지도 않다. 그 관계는 공공연하게 따뜻함을 지녔으며 자발적으로 개인화되었고, 결정적으로까지 부드러워지고 있다. 오를리 공항이나 텔레비전 여자 아나운서들의 극도로 몰개성적인 어조가 그러한 것인데,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계산된 무기력한 미소이기도 하다(그러나 실제로 이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도 아니며 또 계산된 것도 아니다. 진심이냐 빈정거림이냐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며, '기능화된' 인간관계 - 각 사람의 성격이나 심리뿐만 아니라 실제의 감정적인 조화도 일체 없애버리고 이상적 관계라는 계산된 반향에 입각해서 재구성된 인간관계가 문제이다. 간단히 말하면 존재의 본질과 외관의 노골적인 윤리적 변증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관계의 체계의 기능성만을 담당한 인간관계가 출현한다).

서비스가 소비의 대상이 되는 현대사회에서도 우리는 아직도 이 두 개의 영역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데, 자크 타티(Jacques Tati)의 영화 <플레이타임 (Playtime)>은 이 상황을 매우 잘 표현하였다. 옛날 그대로의 뻔뻔스러운 사보타주, 여러 서비스의 신랄한 패러디 (고급 나이트클럽을 무대로 한 에피소드-언 생선요리가 이 테이블에서 저 테이블로 돌려지며, 기계가 고장나고, 손님을 받는 태도가 이상하며, 초모던적인 세계가 붕괴되어버린다), 또는 어떤 회사 응접실 및 유리로 된 정면현관으로 대표되는 아무 데도 쓸모없는 도구와 같은 안락의자와 관엽식물의 기능성(무수한 가제트와 나무랄 데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쌀쌀한 배려 속에서는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하지 않는다)을 타티는 훌륭하게 영상화하였다.

광고와 증여의 이데올로기

광고의 사회적 기능은 증여, 무상성(無償性), 서비스 등의 이데올로기와 똑같은 경제외적인(extra-économique) 시각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광고는 단지 판매촉진 및 경제적인 목적의 암시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아마도 광고의 일차적인 사명이 아닐 것이다(광고의 경제적 효용은 최근 점점 더 의문시되고 있다). '광고언설'의 특성은 무상성의 힘을 빌려 상품교환의 경제적 합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2)

이 무상성은 경제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할인품, 특가품, 회사로부터의 증정품, 덤으로 제공되는 미니 가제트, '새 고안물(gimmicks)' 등이다. 경품, 퀴즈, 현상(懸賞), 특별세일 등의 범람은 판매촉진의 개막무대이며, 현재 판매촉진은 이러한 모습으로 일반 주부들 앞에 나타난다. 그녀들의 하루를 몽타주 사진풍으로 스케치해보자:"아침, 소비자인 주부는 플로렌스사의 대현상(大賞)에서 행운으로 얻은 마이홈의 덧문을 연다. 그러고 나서 트리코트사 덕분에 (케이크를 샀다는 증거로 5매의 상표와 9.90프랑을 보내서 얻은 페르시아풍화려한 모닝컵으로 차를 마신다. 3J사의 특매품(20% 할인하였다)인 예쁜 원피스를 입고 슈퍼마켓 프리쥐닉에 간다. 현금 없이도 살 수 있는 크레디트 카드도 잊지 않는다. 점심식사할 곳을 마침 찾았다! 슈퍼마켓에서는 뷔토니사의 마법환등게임에서 이겼기 때문에 최상품 닭고기한 상자 (5.9 프랑)를 0.4프랑 싸게 샀다. 아들을 위해 교양이 넘치는 것으로 페테르 반 호(Peter Van Hought) (17세기 네덜란드의 풍속화가)의 그림이 복제되어 있는 페르실 세제(洗劑)를 산다. 켈로그사의 콘플레이크 덕분에 아들은 모형비행장을 조립하며 논다...……… 오후, 브란덴부르크협주곡을 들으면서 쉰다. 이 LP 레코드는 트리 팍 산펠레그리노사의 아페리티프 상표에 8프랑을 함께 보내서 얻은 것이다. 저녁 때는 더욱 즐거운 일이 있다: 필립스사에서 3일간 빌려준 컬러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다. 3일간의 무료사용기간 후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려줘도 무방하다('신청만 하시면 보내드립니다. 구입 의무는 없습니다') 등." "최근에는 세제보다도 판매촉진용 경품이 더 많이 나갑니다"라고 어느 세제회사의 영업부장은 한숨짓는다.

이러한 경향은 PR 활동 전체에서 보면 하찮은 것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모든 광고는 이 '별것 아닌 덤'의 거대한 확대적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상적인 하찮은 팁이 광고에서는 전면적인 사회적 사실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광고는 일종의 '베푸는 것', 즉 모든 사람에 대해서 또 모든 사람을 위하여 무상으로 제공되는 증여이다. 풍부함의 매혹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특히 무상의 베풂이라고 하는 잠재적인 기적이 반복되는 증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광고의 사회적 기능은 PR 활동의 한 부분으로서의 기능이다. 이 PR 활동이 어떻게 행해지는가는 잘 알려져 있다. 가령 공장견학도 그 일종인데, 생고뱅사(Saint Gobain: 프랑스 최대의 유리제품 제조회사)의 경우에는 루이 13세 시대의 성에서 행해지는 관리직의 재교육, 공장장의 사진에 잘 나타나는 미소, 공장 내에 배치되어 있는 미술품, 그룹 다이내믹스 등이 차례로 소개된다("PR맨의 임무는 일반대중과 경영자간의 이해관계의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모든 형태의 광고의 기능은 옛날에 귀족들이 인민들에게 축제를 베풀어준 것처럼, '덤'을 제공하는 자애로운 집단적인 초(超)옹호자 및 초지배세력(대기업)의 비호하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일된 사회조직을 정비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사회적 서비스인 광고를 통해서 모든 제품은 역시 서비스의 형태로 제공되며 현실의 모든 경제적 과정이 증여, 개인적 성실 및 친애의 정에 기초한 결과인 것처럼 연출되고, 게다가 사회적으로는 그러한 것으로 재해석된다. 전제군주에게 어울리는 이 자애로움은 사실 이윤의 일부의 기능적 재분배 이상의 것이 아니며, 그러한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광고의 교활함은 바로 도처에서 시장의 논리를 '카고(Cargo)'의 주술(미개인들이 꿈꾸는 완벽하고 기적적인 풍요)로 대체하는 것이다.

모든 광고활동은 이 방향으로 가고 있다. 광고가 어디에서나 은은하고 관대하며 또 소란스럽지 않고 공평하게 보이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일 분간의 짧은 광고를 위한 한 시간의 라디오 프로그램, 4페이지에 걸친 시적 문장 중 마지막 한 페이지 밑에 등장하는 부끄러워하는(?!) 회사 상표. 은은한 광고와 '반(反)광고적' 패러디를 추구하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백만 대째의 폴크스바겐 광고를 위한 백지의 페이지가 좋은 예다: "이 차를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방금 팔렸습니다." 광고용 수사의 역사에 남을지도 모르는 이러한 예들은 광고가 경제적 구속에서 해방되고 놀이와 축제, 자선제도 및 공평한 사회적 서비스 등의 허구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공평하며 무사무욕하다고 드러내보이는 것은 부의 사회적 기능(베블렌)으로서 또한 사회통합의 요인으로서 작용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소비자에 대해서 공격적이 되거나 반어적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팔리게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합의, 공범, 공모(共)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간단하게 말하면 여기에서도 또한 관계와 사회의 통일성, 커뮤니케이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면 뭐든지 좋다. 광고에 의해 유도된 이 합의가 그 다음에는 사물에 대한 집착 및 구매행동, 소비하라는 경제적 지상명령에의 암묵적인 복종으로 귀착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광고의 이 경제적 기능은 광고의 사회적 기능 전체의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적 기능만을 확보하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다. 

쇼윈도

광고와 함께 도시에서 우리 소비활동 흐름의 중심이 되고 있는 쇼윈도는 유행의 논리(누구의 눈에도 분명한 무언의 논리)를 매일 끊임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사회 전체가 균질화되는 '합의작전 (opérationconsensus)', 커뮤니케이션 및 가치교환이 행해지는 장소이다. 쇼윈도라고 하는 가게 안도 밖도 아니며 사적인 장소도 공공의 장소도 아닌 특수한 공간, 이미 거리의 일부이면서 그 투명한 유리 뒤에서 상품의 불투명한 지위 및 우리와의 거리를 유지시키는 데에도 쓸모 있는 공간은 또한 특수한 사회관계의 장(場)이기도 하다. 윈도 쇼핑, 즉 끊임없는 욕구불만을 일으키는 그 윈도에 비치는 계산된 몽환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왈츠는 교환이 실현되기 전에 재화를 찬양하기 위해 행해지는 카나카인(하와이 및 남양군도의 원주민)의 무용이다. 쇼윈도에는 여러 사물 및 제품이 화려하게 연출되고 신성한 물품인 것처럼 뽐내면서 진열되어 있다(광고의 경우처럼 단순히 물품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진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G. 라뇨가 말하는 바와 같이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의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연출되어 진열된 사물에 의해 암시되는 상징적 증여, 쇼윈도 속의 사물과 인간의 시선간의 상징적인 무언의 교환은 물론 가게 안에서의 실제적인 경제적 교환으로 이끌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쇼윈도의 수준에서 성립하는 커뮤니케이션은 개인과 사물간의 커뮤니케이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개인들 서로간에 보편화된 커뮤니케이션인데, 이것은 사람들이 똑같은 사물을 보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똑같은 사물 속에 똑같은 기호체계와 가치의 위계코드를 읽거나 인식하는 것을 통해 실현된다. 거리, 빌딩 벽면, 지하철 연결통로, 간판 및 르네상스 등 도처에서 매순간 행해지는 것은 이 문화변용을 위한 훈련이다. 따라서 쇼윈도는 가치형성의 사회적 과정이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게 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쇼윈도를 들여다보는 것에 의해 끊임없는 변화에의 적응성과 사회에의 순응성을 테스트 받고 또 유도된 자기투영능력을 시험당한다. 백화점은 도시의 고유한 이 과정의 소위 정점이며 진정한 실험실, 사회의 도가니이다. 그곳에서는 "집단이 축제 및 구경거리에서처럼 자신들의 응집력을 강화한다(뒤르켐,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Les Formes élémentaires de la viereligieuse)》).

치료하는 사회

항상 당신을 위해 신경쓰는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당신을 잠재적인 환자로 간주하여 간호하려는 사회의 이데올로기에서 절정에 달한다. 따라서 전문가, 도덕주의적인 정신분석의사, 신문 및 잡지 등이 도처에서 '치료'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병들어 있으며, 소비자인 시민들은 몸과 마음이 모두 쇠약하며 항상 졸도하거나 발광하기 직전에 있다고 생각될 정도다.

블뢰스텡 블랑: "의사가 정신분석 및 뢴트겐 촬영을 환자에게 하듯이, 광고업자는 여론조사라고 하는 필수불가결한 측정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어느 광고업자: "고객이 구하는 것은 안심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안심시키고 보살펴주는 것을 그는 필요로 한다. 그에게 있어서 광고업자인 당신은 어느 때는 아버지나 어머니이며, 또 어느 때는 자식이다......" "우리의 직업은 의술에 가깝다." "우리는 군의관 같은 사람들이다. 충고는 하지만 강요는 하지 않는다." "의사와 마찬가지로 나도 일종의 성직자이다."

건축가, 광고업자, 도시계획가, 디자이너 등은 모두 사회관계 및 환경의 창조자 또는 오히려 마술사임을 자임하고 있다. "사람들은 추악한 현실 속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이 현실을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리사회학자들도 스스로 인간적·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임상의 이기를 바라고 있으며, 실업가들조차도 자신들을 복지 및 사회 전체의 번영을 사명으로 삼는 전도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회는 병들어 있다." 이 말은 영향력 있는 자비로운 모든 사람들의 중심사상이다. 소비사회는 암세포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 사회에 영혼을 보충해주어야 한다"고 샤방델마스는 말한다. 현실의 제(諸)모순에 대한 분석을 모두 배제하는 '병든 사회'라는 이 커다란 신화를 창출하는 데 현대의 주술사인 지식인들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회의 병이 어디에 있는가를 근본적으로 밝히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장래에 대해서 비관적이다. 그렇지만 기업 및 관청의 전문가들은 대체적으로 '병든 사회'의 신화를 체질적으로가 아니라(이 입장에 서면 사회는 불치의 병에 걸려 있다) 교환과 신진대사의 수준에서 기능적으로 유지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서 그들의 활기찬 낙관주의가 생겨난다. 그들은 병든 사회를 치료하는 데는 교환의 기능성을 회복시키고 신진대사를 가속화하는 것(즉, 또다시 커뮤니케이션, 관계, 접촉, 인격상의 안정, 따뜻함, 효율, 관리된 미소 등을 주입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활동하면서 이익을 추구한다.

배려의 애매함과 테러리즘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은 여러 배려의 의식(儀式)이 모두 대단히 애매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애매함은 배려 (sollicitude)의 동사형 'solliciter'가 다음과 같은 이중의 의미를 가지는 데서 유래한다.

1. 이 동사가 명사형으로 'sollicitude' (배려)를 취할 경우 신경쓰다, 은혜를 베풀다, 어머니처럼 돌봐주다 등의 의미가 된다(이것이 이 말의 가장 명백하고 가장 일반적인 의미이며, 증여 (Don)와 동의어이다).

2. 명사형으로 'sollicitation'(간청)을 취할 경우 의뢰하다(회답을 구하다), 요청하다, 징집하다 등 앞의 것과는 반대의 의미가 된다(극단적인 경우 "나는・・・・・・ 하도록 부추김을 받았다" 라는 표현법도 있다). 이 의미는 "숫자를 왜곡하다, 사실을 왜곡하다" 같은 현대적 표현에서 더욱 명확하게 사용되고 있다. 즉,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방향을 바꾼다거나 유혹하는 것인데, 배려의 정반대이다.

그런데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수가 늘어나고 있는 PR 및 광고등의 배려의 기구(제도화된 것과 제도화되지 않은 것 모두를 포함해서)는 예외없이 은혜를 베풀고 만족시키는 동시에 은밀하게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유혹하고 방향을 바꾸는 기능을 하고 있다. 평균적인 소비자는 이 이중적 시도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말의 모든 의미에서 'solliciter'되고 있다. 따라서 'sollicitude'가 전달하는 증여의 이데올로기는 항상 'sollicitation'29)에 의한 실제적인 조건지움의 좋은 구실이다.

그 특별한 부드러움으로 풍요로운 소비사회를 특징짓고 있는 배려의 주술적인 수사(修辭)는 다음과 같은 명확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1. 기술적·사회적 분업에 의해, 또한 소비행동의 똑같이 전면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기술적, 사회적 분할에 의해 관료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부드러움에 대한 재교육을 행하는 것.

2. 무능한 정치제도를 보충하고 그 대역(代役)을 할 수 있는, 사회의 형식적 통합을 위한 정치전략을 결정하는 것: 보통선거, 국민투표, 의회제도가 국민의 형식적 참가에 의한 사회적 합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들과 똑같이 광고, 유행, 인간관계, PR 활동 등도 일종의 끊임없는 국민투표(référendum perpétuel)로 해석될 수 있다. 이 경우 소비자인 시민은 어떤 일정한 코드에 동의를 나타내고 이 코드를 암묵적으로 승인하도록 끊임없이 간청받게 된다. 그들의 동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이 비공식적인 체계는 사실상 '아니오(non)'라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더 한층 확실하다(국민투표제도도 '예oui'라고 말하게 하기 위한 민주적 연출이다). 현재 모든 나라에서는 사회통제의 폭력적 과정(국가기구와 경찰기구에 의한 억압과 구속의 과정)이 '국민참가방식'에 기초를 둔 사회통합의 형태 -우선은 의회와 선거라는 형태, 이어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간청의 비공식적인 과정 로 교체되고 있다. 부수아(프랑스 제2의 유리제품 제조회사)에 의한 생고뱅 회사 주식의 공개매입이라고 하는 사회학적 대사건에 퓌블리시스(대광고회사)와 생고뱅이 전개한 PR 작전을 이러한 관점에서 분석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이 작전에서는 여론이 증인으로 동원되어 부추겨지고 '심리적 주주'가 되도록 요청되었다. '민주주의적인'정보제공을 구실로 일반대중이 어느 한 자본주의 기업의 재편을 둘러싼 소동에 배심원으로 합류되었으며, 생고뱅의 상징적 주주클럽, 즉 당사자로서 조직되었다. 이 예에서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광고활동이 어떤 식으로 사회과정 전체를 규정하는가, 심리적 동원과 심리적 통제에 있어서 어떻게 일상적으로 (게다가 틀림없이 보다 유효하게)선거제도를 대신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수준에서 독점자본의 생산지상주의 및 '전문기술 관리 계급의 객관적 발달과 때를 같이 하여 완전히 새로운 정치 전략이 태어나고 있다.

3. 'sollicitation'과 'sollicitude'에 의한 '정치적' 통제는 동기부여에 대한 보다 내면적인 통제를 동반한다. 동사 solliciter'는 이 점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모든 배려는 이런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폭력적(terroriste)이다. "젊은 여성이 '프로이트를 대단히 좋아한다'고 말한다면‘만화를 대단히 좋아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로 시작되는 광고문안은 좋은 예이다. "젊은 여성은 모순투성이의 '조그만 야수'입니다. 그렇지만 이 모순들에 유혹당하지 않고 젊은 여성을 이해하는 것, 보다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말을 걸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우리 광고맨의 임무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또 자신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아는 능력이 없지만, 우리는 바로 그것을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에 대해서 당신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가부장적인 정신분석의사의 억압적 태도이다. 이 '보다 뛰어난 이해'의 목적은 분명하다. "우리를 이해받기 위하여 사람들을 이해하고, 이쪽에서 말하는 것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말 거는 방법을 통달하고, 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에 들도록 하는 것, 요약컨대 당신 회사의 제품을 사람들에게 팔아넘기는 기술을 통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이 말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상술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 광고문안에 등장하는 젊은 여성은 프로이트를 좋아할 권리가 없으며, 그녀는 착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쪽에서 그녀를 위해 그녀가 몰래 좋아하고 있는 것을 주고자 하는 것으로, 이것은 정말로 사회적 심문, 심리적 억압 그 자체다. 광고 전체에서 보면 이것만큼 본심을 털어놓는 것은 없지만, 여하튼 광고는 이것과 똑같은 자선적 및 억압적 통제의 메커니즘을 끊임없이 작동시키고 있다.

여기서 다시 TWA항공사의 "우리 회사는 당신을 이해하는 회사입니다"라는 광고문안을 살펴보자. 그러면 이 회사가 당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호텔 방에서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 회사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음 번의 상용(商用)여행에는 부인을 동반할 수 있도록 우리 회사는 가족특별할인 등 될 수 있는 한 편의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부인이 곁에 있으면 채널을 바꾸는 데에도 경쟁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 혼자 있어서는 안 되며, 당신에게는 혼자 있을 권리가 없다: “우리 회사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가르쳐 드리지요. 심지어는 섹스하는 방법도, 당신의 '아내'는 당신의 에로틱한 '제2의 채널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몰랐습니까? 우리는 당신에게 그것 또한 가르쳐드리지요. 왜냐하면 당신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 회사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측정학적 융통성 사교성, 즉 '접촉을 만들어내고 관계를 유지하며, 교환을 촉진하고 사회적 신진대사를 강화하는 능력이 현대사회에서는 '퍼스낼리티(personnalité)'의 증거가 된다. 소비, 지출, 유행 등의 활동 및 그것들을 통한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 《고독한 군중》에서 리스먼이 소묘한 것과 같은 현대의 사회측정학적 퍼스낼리티의 중심 중의 하나이다. 염려와 배려의 전 체계는 사실 개인의 지위를 전면적으로 바꾸어버린 인간관계 체계의 일부를 이루는 기능화된 상냥함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소비와 유행의 사이클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사물 및 서비스에 둘러싸이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의미 그 자체를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아(自我)의 자율성, 성격, 고유한 가치에 근거한 개인적 원리에서 개인의 가치를 합리적으로 감소시키고 변동시킨 코드에 따라서 행해지는 끊임없는 르시클라주(recyclage, 재교육)의 원리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코드가 '개성화(personnalisation)'의 코드인데, 이것을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사람은 없지만 타자와의 명시적 관계에서는 누구든지 이것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결정의 심급으로서는 '인격'이 소멸하고 개성화의 원리가 지배적이 된다. 그 결과 개인은 더 이상 자율적 가치의 중심이 아니며, 유동적 상호관계 과정에서의 다양한 관계의 한 항목에 지나지 않게 된다. "타인지향형 인간은 어떻게 보면 모든 장소에서 건재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안주할 곳이 어디에도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피상적이라 할지라도 누구하고나 재빨리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리스) 사실 이런 형의 인간은 일종의 사회측정학적(sociométrique)인 사회적 관계의 도표 속에 끌어들여져 기묘한 거미줄을 생각나게 하는 도표(적극적 또는 소극적, 일방적 또는 상호적 관계의 그물 속에서 개인 A, B, C, D, E를 연결시키는 선들)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의해 끊임없이 재규정된다. 요약하면 그는 사회측정학적 존재, 타자와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단순한 '이념적' 모델이 아니다. 이 자기에의 타자의 내재화(內在化)와 타자에의 자기의 내재화는 제한 없는 상호관계의 과정에 따라서 사회적 지위에 관한 모든 행동(즉, 소비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여기서는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자유'를 지닌 개별화된 주체도, 사르트르적인 의미에서의 '타자'도 존재하지 않고, 인간관계의 각 항(項)이 그 차이적 변화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분위기'가 일반적이 된다. 이 경향은 요소로서의 사물이나 현대적인 인테리어 속에서의 그 사물들을 조합하는 경우에 확인되는 것과 똑같은 경향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유형의 사회통합에 있어서는 '순응주의(conformisme)'나 '반(反)순응주의(non-conformisme)'냐라는 주제는 문제되지 않는다(저널리즘은 이 용어들을 변함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본래 전통적인 시민사회의 용어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는 오히려 최적사회성(最適社會性, socialité optimale), 즉 타인, 다양한 사회적 입장, 직업과 가능한 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것(르시클라주, 무엇에라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 모든 수준에서의 사회적 이동에 순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장소에서도 '이동할 수 있고 신뢰받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휴먼 엔지니어링 (인간공학) 시대의 '교양'이다. 이렇게 해서 분자화(分化)된 인간들은 다양한 원자가를 가지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때에 따라서는 분해되어 조성을 바꾸기도 하고 구조가 복잡한 분자(分子)가 되기도 한다... 이 적응력은 '전통적인' 벼락부자나 자수성가 한 사람의 승진과는 다른 사회적 이동에 대응하고 있다. 여기서는 자기 나름의 생활방식에 따라서 타인과의 유대를 끊어버리는 일이 없으며, 자신이 속한 계급과 결별하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일도 없으며, 이례적인 초고속 출세를 하는 일도 없다. 모든 사람과 함께 이동하고, 기호가 엄격하게 배열되어 있는 위계제도의 코드화된 계급을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물론 이동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동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일종의 인물(人物)증명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끊임없는 '동원(mobilisation)'의 강제이기도 하다. 더구나 모든 순간에 시험당하는 이 융통성 (comptabilité)은 그 사람이 계량화될 수 있다는 것(comptabilité)을 항상 의미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을 둘러싼 관계의 총화, 자신이 가지는 '원자가'의 총화로서 규정된 개인은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항상 계량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계산의 한 단위가 되며, 사회측정학 (또는 정치적)프로그래밍 속에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기확증과 동의

이미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지 않고 기능적 융통성만으로 이루어진 이 불안한 관계의 망(網)에서는 '인정받는 것'이나 '역량을 발휘하는 것'(자신의 역량의 증명 'Bewährung')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타인과 접촉하거나 동의를 구한다든지, 아니면 판단이나 적극적인 교제를 간청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 동의에의 맹신이 도처에서 자기확증에의 맹신으로 점차 대체되고 있다. 전통적인 개인의 초월적 자기실현이라는 목적이 (위에서 정의한 'Werbung권유, 광고'의 의미에서) 상호적인 간청 (sollicitation)의 과정에 압도되고 있다. 각각의 사람은 '간청함'과 동시에 간청받고, 조작함과 동시에 조작당하고 있다.

이 사태야말로 새로운 도덕(morale), 즉 개인주의적 또는 이데올로기적인 제가치보다 일종의 일반화된 상호적 관계,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나 찬동, 불안에 가득 찬 커뮤니케이션이 우세하게 되는 도덕의 기반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을) '말하고(parlent)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에서이다. 자동사적인 의미에서는 그들이 당신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며, 타동사적인 의미에서는 그들이 당신을 표현하며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한다는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을 둘러싸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요컨대 당신을 속이는 것)보다 "당신에게 말을 걸고 당신에 대해 말하려고 노력하는 광고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도덕의 거대한 표현을 보았다. "조니가 모래장난보다 모형트럭을 가지고 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놀이를 하더라도 그가 빌과 사이 좋게 노는가 아닌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리스먼은 말한다. 이리하여 집단이 무엇을 생산하는가에 대해서보다도 그 집단 내부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이 주어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집단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말하자면 관계를 생산하고 그 관계를 점차적으로 소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어떤 집단의 성질은 그 외면적인 목표와는 무관하게 이 과정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경우도 있다. '분위기'라는 개념은 이 상황을 꽤 잘 요약하고 있다: '분위기'란 사람들의 집단에 의해 생산되고 소비되는 다양한 관계의 막연한 총화, 즉 집단의현실모습 그 자체다. 이러한 분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프로그래밍해서 산업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실제로 이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다.

보통의 의미를 훨씬 넘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분위기라는 개념은 소비사회 특유의 개념이며, 그것에 의하면 소비사회는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1. '목표'와 초월성의 가치(목적론적 이데올로기적 가치)가 관계의 성립과 동시에 '소비되는' 분위기의 가치(관계적 내재적으로 목표를 가지지 않는 가치)로 대체되는 사회가 소비사회다..

2. 소비사회는 동시에 재화의 생산 및 관계의 가속도적 생산의 사회이기도 하다. 소비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바로 이 제2의 측면이다. 관계의 이러한 생산은 공동주관적(共同主觀的)인 수준 또는 일차집단의 수준에서는 여전히 수공업적이지만 물질적 재화의 생산양식, 즉 일반화된 산업양식에 동조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같은 논리에 따라서 이 관계의 생산은 그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적 또는 국영기업에 의해(독점적은 아니더라도) 행해지는 것이 된다. 이 기업들에게는 관계의 생산이야말로 사회적 및 상업적 목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태의 발전이 무엇을 초래할 것인지는 아직 예상하기 힘들다: 사물을 생산하듯이 (인간적·사회적·정치적) 관계를 생산하며, 또 이렇게 해서 생산된 관계가 사물과 똑같은 자격으로 곧바로 소비대상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장기간에 걸쳐 계속될 새로운 과정이 겨우 시작된 것뿐이다. 30)

30) 예를 들면 어떤 판매촉진 전문가는 이렇게 말한다: "실은 지스카르 데스탱의 구상이 생고뱅사건에서 성공한 방법에 따라서 퓌블리시스사와 같은 광고회사의 손으로형태를 정비하고 나서 여론 앞에 나타났다면 아마도 프랑스 국민은 그에게 찬성하였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구상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새로운 화장비누를 팔기 시작할 때에도 우리는 모든 현대적 수단을 사용하여 대중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는데, 정부가 몇십억 프랑이나 필요로 하는 경제 및 재정계획을 프랑스 국민에게 팔고자 할 때 구태의연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성실함의 신앙 기능적 관용

물질적 재화나 노동력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이것들과 같은 논리에 따라서 생산되고 소비되기 위해서 관계는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전통적인 인습이나 사회적 의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일반적이 된 기능적 관계와는 양립할 수 없는 예의범절이나 에티켓의 종언이다. 그러나 예의범절이 무너졌다고 해서 곧 자발적인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관계 그 자체는 산업적 생산과 유행의 체계에 지배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발성의 반대물이기 때문에 자발성에 관한 모든 기호를 지니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성실함의 신앙'에 대한 묘사에서 리스먼이 지적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미 언급한 '따뜻함'과 '배려'에의 맹신이나 부재(不在)의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기호와 강제적 의례에의 신앙과 같은 종류의 신앙이다.

"그들(일반대중이 성실함을 추구하는 것은 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또한 타인에 대해서 별로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의 발로이다." (리스먼, 《고독한 군중》)

친밀한 교제, '직접 인터뷰', 어떻게 해서든지 '대화'를 성립시키고자 하는 강제 등에 붙어다니는 것은 사실은 잃어버린 성실함의 망령이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소멸하였다. 따라서 성실함 만세라고 하는 것이다. 보다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이 현상을 고찰해보자. '양심적인가격', 스포츠의 세계뿐만이 아닌 연애나 정치에서의 페어 플레이, '높으신 분들'의 솔직함, 영화 등의 스타들의 '적나라한 고백, 망원렌즈로 포착한 각국 왕실의 일상생활 등에 대한 사람들의 강박관념적인 관심의 배후에는, 즉 성실함에의 과도한 요구(그것은 현대건축에서 재료에 대한 수요와 비슷하다) 속에는 문화변용을 받은 계급의 전통적 문화와 의례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반발이 아마도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문화와 의례는 어떤 형태를 취하더라도 항상 사회적 거리를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성실함'의 신앙이라고 하는 대중문화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강박관념은 문화적으로 영락(零落)한 사람들의 계급적 의사표시이며, 기호에 의해 속았고 조작당해왔다는 강박관념(사실 그들은 수세기에 걸쳐서 그러한 상태에 있었다) 혹은 고상하며 격식을 중시하는 문화에 대한 공포 또는 거부('꾸밈없는' 문화나 직접적 커뮤니케이션의 신화 속으로 떠밀려서 들어가고 있지만)라고 해도 좋다.

어쨌든 산업주의적 성실함의 문화에서 소비되는 것은 역시 성실함의 기호이다. 이러한 성실함은 존재와 외관의 관계처럼 파렴치함이나 위선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기능적 관계의 장(場)에서는, 파렴치함과 성실함이 기호의 조작 속에서 어떠한 모순도 없이 교체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성실함은 선이며 인위적인 것은 악이라고 하는 도덕적 도식은 항상 작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현실적인 특질을 함의하지 않고 성실함의 기호와 인위적인 것의 기호 사이의 차이만을 함의하는 것에 불과하다.

'관용'의 문제(자유주의, 방임주의, '관대한 사회 permissive society' 등)도 성실함과 같은 방식으로 제기된다. 오늘날에는 이전의 불구대천의 적(敵)끼리 이야기하고 가장 격렬하게 대립하였던 이데올로기들 사이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고, 모든 수준에서 일종의 평화공존이 정착하고 세상 풍조도 부드러워진 것 같은데, 이러한 사실은 인간관계의 '인도주의적인' 진보라든가 사회문제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든가 하는 실없는 소리를 뜻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이러한 사태는 이데올로기, 여론, 미덕과 악덕 등이,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미 교환과 소비의 용구에 불과하며 모든 모순된 사항이 기호의 조합 속에서 등가물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관용은 더 이상 심리적 특성도 미덕도 아니며, 체계 그 자체의 하나의 양태이다. 그것은 유행의 성쇠와 같은 것으로, 롱 스커트와 미니 스커트가 '서로 허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롱 스커트와 미니 스커트라고는 하지만 결국 롱이 있어야 미니가 있는 것이며 미니가 있어야 롱이 있는 것이다).

관용이 윤리적인 의미에서 암시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은 기능/기호, 사물/기호, 존재/기호, 관계/기호, 이념/기호 등의 일반적 상대성이다. 사실 성실함이라고 하더라도 속임수와 대비되는 성실함은 아닌 것처럼, 관용이라고 하더라도 광신과 대비되는 관용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관용 자체는 이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단지 체계가 변화하였으며 기능적 융통성의 시대가 왔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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