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가까운 시간, 야식으로 먹은 치킨에 후회가 몰려왔다. 푸념을 늘어놓느니 그럴 시간에 차라리 아파트 광장이라도 한 바퀴 도는 게 건강에 이롭겠다 싶은 생각에 운동화를 꿰어 신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 아파트 열두 동 사이 한가운데 있는 광장을 반바퀴쯤 도는데 저쪽 광장 한편에서 고성이 오갔다. 벤치들 위로 처마를 바치고 있는 빗살처럼 세워둔 기둥들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앞에 선 두 남녀의 시선아래 누군가 앉아 있는 모습이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보이는 듯했다.
사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의 서너 발짝 뒤로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남자는 할 말을 할 만큼 했는지 뒤돌아 발걸음을 옮겼고 여자가 냉큼 남자의 팔짱을 끼고 남자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남자와 여자는 이야기를 나눴지만 사실은 남자가 성이 덜 풀린 목소리로 크게 떠들었고 여자가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그들은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고 나와의 거리가 점점 더 좁혀지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부담스러워 광장의 둥근 길을 벗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비겁해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겹쳐 어정쩡하게 걷고 있던 참이었다. 문득 남자가 팔짱을 낀 여자의 손을 뿌리치면서 "놔봐. 그냥은 못 가겠어!"라고 말하더니 여전히 벤치에 앉아있는 어떤 이를 향해 씩씩대며 걸음을 옮겼다.
나는 깜짝 놀라 여자를 바라보았고, 나와 시선이 마주친 여자가 내게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저기 앉은 아저씨가 개의 목줄을 묶지 않고 풀어놔서 남편이 한마디 한 거뿐이에요. 그런데 아까 어떤 주민이 그러던데 저 남자분이 아주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묻지도 않았음에도 늘어놓는 여자의 석연치 않은 이야기에 난감해하는 순간 여자에게서 훅 끼쳐오는 술 냄새에 불안과 걱정이 소름처럼 돋았다.
"가서 남편분을 좀 말리세요! 개를 풀어놓은 분이 이상한 사람이라면서요, 게다가 두 분은 술을 마신듯한데 남편분을 데리고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상한 사람을 건드려 좋을 것 없고, 남편분도 술기운에 제어가 안될 수도 있는데.. 얼른 가서 좀 말리세요"
나의 말에 여자가 진짜 별일 아니라는 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남편은 상대를 긁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만 살살 긁는 사람이라 괜찮을 거예요"
나는 아연실색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이 사람들은 평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이런 생각과 표현이 가능한 걸까..
가던 길을 되돌아 씩씩대며 다시 문제 속으로 들어간 남자는 왜 개를 풀어놓냐고 언성을 높였고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 상대 남자는 자기의 입장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그 남자에게서 나온 말이 젊은 남자의 귀에 닿기도 전에 젊은 남자는 상대의 목덜미를 움켜잡었고 둘은 순식간에 엉겨 붙었다. 같은 순간 양철통 같은 쓰레기통이 바닥에 나뒹굴며 아파트가 잠긴 한밤의 고요를 찢어버렸다. 쓰레기통과 함께 개주인이 나뒹굴었다.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싸움을 직관(?)하게 된 주민들의 눈이 휘둥그레져서 뭘 어찌할지 몰라 다들 멍하니 서있을 때 마침 광장을 가로질러가던 남자 서넛이 달려들어 둘을 떼어놓았다. 그러나 둘은 떼어놓기가 무섭게 다시 엉겨 붙기를 반복했고 서로를 밀치고 밀리며 이리저리 흔들리며 휩쓸리고 있었다. 젊은 남자는 드잡이 중에도 그의 아내에게 동영상을 찍으라고 소리를 질렀고 그의 아내는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그녀의 남편의 말에 순종했다. 그 순간만 떼어놓고 보면 핸드폰으로 싸움신을 촬영하는 영화판인 줄 알 것 같다는 생각에 그만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60대로 보이는 개 주인은 젊은 남자에 비해 덩치가 컸다. 그러나 젊은 남자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다부진 상체가 운동 꽤나 한 사람처럼 보였다. 개 주인은 아파트 화단 가장자리를 따라 줄 맞춰 심어놓은 회양목인지 쥐똥나무인지 모를 나무들 사이에 내팽개쳐지듯 쑤셔 박혔다. 목덜미가 잡히고 두서너 차례 주먹질을 당한 직후였고 뭔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다음이었다.
누가 언제 신고를 했는지 경찰이 온다고 누군가 소리쳤다. 서너 명의 경찰이 왔고 조사가 시작되었다. 싸움질을 본 건 열명이상이었는데 사람들의 진술이 묘하게 어긋났다. 다들 그냥 좋게 좋게 화해하고 마무리 하자는 분위기였다. 내 옆에 있었던 청년만이 견주가 피해자라고 경찰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 보기에 청년의 진술이 가장 설득력 있었다. 내가 본 것과도 진술이 거의 일치했고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모습이 진지했다. 청년의 진술에 의하면 싸움 중간에 내가 들었던 뭔가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는 젊은 남자의 아내가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소리였다. 동영상을 찍는 중에도 싸움은 격해졌고, 그들의 불규칙적이고 무질서한 움직임이 어느 순간 균형을 잃고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쓰러질까 무서워 가로등이 달린 굵고 둥근기둥 뒤로 내가 몸을 피하던 순간 그들이 영상을 찍던 여자의 얼굴을 쳤고 놀란 여자가 순간 핸드폰을 떨어뜨렸던 모양이었다.
나는 여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상한 사람이래요.. 내 보기에도 개 주인은 이상했다. 일단 신발을 신지 않고 있었다. 젊은 남자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당했음에도 견주는 자신이 당한걸 경찰에게 거의 제대로 어필하지 못했다. 무릎과 다리 이곳저곳이 까지고 피가 났고 발가락에서도 피가 났다. 발톱이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발바닥도 여기저기 찢어진 것 같지만 그건 경찰이 떠난 다음에나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젊은 남자는 견주 때문에 자신의 팔뚝에 멍이 들었다고 떠들었지만 아마도 견주가 소매를 걷어 보인다면 젊은 남자의 멍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일 듯한데 어찌 된 일인지 견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과연 견주 옆에 개가 한 마리 보였다. 남자들의 싸움에 이목이 집중돼 구석에 앉아 있는 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싸움이 일단락되니 그제야 목줄을 한 개 한 마리가 보였다. 누런빛이 도는 하얀 털을 가진 개는 말랐지만 꽤 큰 편이었다. 문득 그 혼란한 중에도 단 한 번도 짖지 않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눈빛이 너무나 순했다. 이래서 견주는 이 아이를 풀어놨을까..
사람들이 수군댔고, 그중 한 사람이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 아무 데나 똥 싸지 말고 똥마려우면 너네 아빠한테 말해. 알았지?"
이건 또 무슨 소린지.. 한 바탕 싸움이 지난 상황에서 나온 이야기치고는 꽤 난감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건 누가 들어도 견주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내가 광장을 돌기 시작할 때부터 광장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목발을 짚은 목격자에게 저 강아지를 아느냐고 물었다. 경찰이 견주에게 개 목줄을 풀어놨었냐고 물었을 때 견주가 얼버무리고 대답을 제대로 못하자 "아까 풀어놨었잖아요!" 하고 소리치던 대학생 정도의 청년이었다. 내 예상대로 그 학생은 처음부터 상황을 지켜봤고 견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학생은 견주와 같은 동(棟)에 살고 있는데 개가 아무 때나 짖고, 아무 데나 변을 봐도 견주는 신경 쓰지 않았다고 했다. 민원이 들어가 아파트 관리소 직원이 오고, 경찰이 와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아 원성이 자자하다고도 했다. 학생은 오늘 피해자는 견주가 맞지만 그동안의 견주의 행실로 인해 견주 편을 들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은 그간의 일들과는 따로 떼어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사람들은 견주를 동정했다. 견주의 그 간의 밉살스러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같은 동(棟)에 거주하는 주민들조차 그랬다. 젊은 사람의 요청 이후 견주가 개의 목에 목줄을 채운 것으로 보이는데-물론 처음부터 목줄을 채웠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젊은 남자는 계속 삿대질을 해가며 반말로 소리를 지르고 뭔가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듯이 힘을 행사하려 드는 행동에 사람들은 혀를 찼다. 젊은 놈이 싹수가 없이 군다고 수군댔다. 가던 길을 되돌아와-경찰의 중재로 일단 댁으로 가시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씩이나 되돌아와 견주에게 잘잘못을 따지고 밀치고 때리려 드는 행위에 견주가 불쌍히 여겨졌던 탓이다.
경찰도 떠나고 주민들도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난 후 나와 내 옆에 있던 청년만 남았을 때 견주는 끝까지 자신의 편이 되어준 청년에게 고마워했다. 청년은 견주에게 신발을 어디에서 잃어버렸나고 물었지만 내 머릿속에서 견주는 애초에 신발을 신지 않고 나왔을 거라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견주는 신발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 끝내 답하지 않았다. 견주는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혹시 모르니 진단서를 끊어놓으시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절대 합의해 주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젊은 남자도 같은 아파트 주민일 수도 있고, 같은 동네 사람일 수도 있다. 혹시라도 오고 가다 우연히라도 다시 부딪히게 되면 또 무슨 변을 당할지 심히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견주는 확실히 알았을 것 같다. 그동안 본인이 한 행동이 있어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자기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결국 견주가 병원비도 받지 못하고 그냥 합의하는 걸로 일이 마무리가 될듯한데 앞으로 젊은 남자가 더 기고만장하지는 않을지 우려가 된다. 이번 일이 견주는 물론 젊은 남자와 그의 아내에게도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청년과 나는 견주가 그가 사는 아파트 동(棟)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눈인사를 나누고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