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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각을 낚는 어부

by 쿠키

tv 채널을 넘기다 보니 어느 노화백이 50줄에 들어선 유명셰프와 맛을 따라가 함께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온다. 맛집 탐방의 또 다른 형태로써 맛집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더 이상 즐기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다지 흥미로운 프로그램이라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굳이 채널을 멈춘 건 일단 그 두 사람의 조합이 재밌게 느껴졌고 무엇보다 그들이 찾은 곳이 '진천'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친구와의 사소해 보일지언정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들로 인해 온기 가득한 곳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친구는 나와 대학 동기로 특별히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보통의 친구들과 다를 바 없는 사이였다(고 생각되었었다). 졸업을 하면서 시나브로 멀어졌고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다가 10여 년 전 동기 모임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친구가 그저 '친구'라 불리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참 많은 일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이야기들을 친구는 곱게곱게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여 나의 그 시절의 공백을 메꾸어 주었다. 문득 고마움과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우리는 가끔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지만 만나는 게 쉽지 않았다. 당시 친구는 경기도 별내에, 나는 진천 인근 도시에 살고 있어서 오고 가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린 밥 먹고 커피 마실 시간도 내기 힘든 워킹맘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생각한 게 중간 어디쯤에서 만나는 것이었고 거기가 '진천'이었다. 처음엔 경기도 이천쯤에서 보기로 했지만 상대적으로 시간이 있는 친구의 배려로 진천이 최종 낙점되었다.


노화백과 유명셰프가 밥을 먹던 중에 노화백이 식은 밥에 먹는 식은 된장국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단다. 셰프더러 그런 걸 만들어 팔아보라고 권할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었다.


얼마 전, 애들 아빠의 출근보다 등교가 이른 아이를 위해 밥과 된장찌개를 챙겨 주고 나도 출근 준비로 한창일 때 아이는 늦었다며 밥 한술 뜨지 않고 후다닥 뛰어 나갔다. 마침 잠에서 깬 애들 아빠가 눈을 비비고 나와 냄비 뚜껑을 열어 보기에 식탁에 있는 밥과 된장찌개를 우선 먹으라고 하였다. 갑자기 아이들 아빠가 화를 냈다. 왜 아이가 먹다만 밥을 먹으라고 하냐며. 나는 숟가락도 안 댄 거라고 말해주었지만 애들 아빠는 화가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이들 아빠도 눈이 달렸으니 먹던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을 터였다. 게다가 우리의 아침은 대부분 정신없이 분주하여 식탁에 오른 보글보글한 찌개가 식탁에서 식어가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새삼스레 식은 밥을 먹으라 했기로서니 아이들 아빠가 기분이 상해 화를 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이들 아빠는 식은 밥을 먹으라는 말이 찬밥 취급처럼 느껴졌던 걸까. 아니면 따순 밥의 온도가 존중과 애정의 척도라고 여겼던 걸까.. 아무튼 식은 밥이 주는 이미지가 이럴진대 식은 밥과 된장국을 메뉴 화해서 팔라니..


생각해 보니 나도 식은 밥에 된장찌개를 맛있게 먹은 기억들이 솔찮게 있었다. 양은냄비 바닥이 드러나고 굵은 멸치 맛이 진한 된장국에 살짝 입이 저려질 때쯤 식은 밥 한 숟가락이 못내 아쉽던.. 노화백처럼 흘려버리지 않고 의식의 표면 위로 끌고 오지 못했을 뿐. 만약에.. 만약에.. 아이들 아빠가 노화백처럼 식은 된장국에 식은 밥이 맛있었던 기억이 한 장의 사진처럼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면 화를 내는 대신 추억까지 더해 식은 밥과 된장국을 기꺼이 맛있게 먹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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